필리핀, 떠오르는 ‘기회의 땅’
  • 마닐라·클락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2.24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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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진중공업의 조선소 건립 등으로 투자 1위 국가 부상

ⓒ필리핀관광청 제공

이진형 J&K글로벌프로퍼티벤처스 사장(37)은 필리핀 클락 경제자유구역 내 아귀나르도 가의 땅 6천7백평가량을 클락개발공사(CDC)로부터 임차해 고급주택단지를 개발하고 있다. 이사장은 국내 감정평가법인에 근무하면서 얻은 부동산 개발 경험을 밑천삼아 미국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는 친구와 손잡고 필리핀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클락은 인근 낙후 지역인 앙겔레스 지역과 펜스를 경계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주거 환경이 우수하고 출입구에서 검문 검색이 삼엄하다 보니 치안 상태가 좋다. 구역 안에 36홀 골프장 2곳과 18홀 골프장이 있고, 5성급 호텔과 리조트 시설도 갖춰져 있다. 클락국제공항이 구역 내에 자리하고 있어 항공편 이용도 편리하다. 그러다 보니 클락은 외국인 거주 환경으로는 최상의 후보지로 꼽힌다. 최근 한국인 편의시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한국인에게도 투자 유력지로 떠올랐다.

이진형 사장은 “클락 내에 있는 외국 업체가 1백40곳이 넘는다. 짓기만 하면 임대 수요는 풍부하다. 지금 모델하우스에 인접해 지어진 주택에는 텍사스인스트루먼츠 임원이 연 임대료 4천만원을 내고 살고 있다. 주택값이 2억원 안팎이므로 연 20% 수익률이 보장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사장은 지난해 초 한국인 투자자를 유치했고 선분양 계약도 순차적으로 완료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지난해 9월. 미국 비우량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파생된 금융 위기가 터지자 한국인 투자자는 투자 의사를 철회했고 선분양 계약 건도 취소되었다. 이사장은 지금 서울과 클락을 오가면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 

금융 위기 후 은퇴 이민 줄었지만 부동산 투자는 ‘호황’

최근 들어 필리핀 은퇴 이민을 희망하는 한국인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한국 대행업체인 락소에는 지난해 8월까지 한달에 8~10명까지 은퇴 이민이 접수되었다. 이상철 락소 과장은 “지난해 9월 이후 개장 휴업 상태이다. 필리핀 이민 접수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장 큰 원인은 환율이다. 환율 급등이 은퇴 이민 수요를 크게 위축시켰다. 지난해 초 필리핀 통화 1페소 당 25원 안팎에 불과하던 환율이 현재 1페소당 30원이 훌쩍 넘었다. 더욱이 은퇴 이민 투자금 일부를 달러로 예치시켜야 한다. 예산이 당초 예상치보다 크게 늘어나 은퇴 이민 후보지로서 필리핀의 매력이 크게 떨어졌다.

은퇴 이민 수요는 줄었으나 부동산이나 비즈니스 부문의 투자 열기는 식지 않았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 내 비즈니스 중심지인 마카티와 신도시 보니파시오에서는 주상복합단지를 찾는 한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필리핀 부동산투자자문사 퓨처스홀딩스 김유정씨(32)는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 수는 줄었지만 부동산 투자를 탐색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환율과 금융 위기 사태가 진정되면 투자에 나서려는 대기자가 많다”라고 말했다. 중동인이나 유럽인의 투자는 오히려 늘어났다. 마카티 외곽에 짓고 있는 주상복합건물인 그리마시나 나이트브릿지는 최근 분양가를 올렸음에도 전체 세대의 80% 이상이 팔렸다.

지금 필리핀은 겨울철이라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고 건기라서 클락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지난 2월 둘째 주 클락 내 숙박시설인 아시아나그린빌은 예약이 꽉 차 방이 없었다. 하루 한 편 운항하는 클락행 아시아나 비행편도 표를 구할 수 없었다. 주로 골프 관광을 목적으로 클락을 찾는 한국인 가운데 클락 지역 부동산 투자를 알아보는 이가 섞여 있다. 클락개발공사(CDC) 법률 자문부서 프레실라 헤르난데스 씨는 “한국인의 클락 내 투자 상담이 지난해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상담 문의는 여전하다. 지금도 한국 업체가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필리핀 부동산 경기는 금융 위기 여파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전세계 국가로 이주해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번 돈으로 고급 주택을 비롯해 부동산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필리핀 인구 9천만명 가운데 해외 근로자 수가 8백만명이 넘는다. 해외 근로자가 해마다 필리핀으로 송금하는 금액이 1백65억 달러(2008년 기준)나 된다. 필리핀 국내총생산의 10%와 외환보유고의 43%를 차지한다. 에릭 소리아노 필리핀은퇴산업청 자문관은 “필리핀계 미국인 전문직 종사자들과 활동적인 은퇴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은퇴 이민 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유무역협정 발효되면 투자 급증할 듯

▲ 필리핀 마닐라 상업 중심지 마카티의 아얄라 빌딩. ⓒ필리핀관광청 제공

한국인의 은퇴 이민 수요는 한풀 꺾였으나 국내 업체의 필리핀 투자는 여전히 강세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필리핀 정부 기관에 등록한 한국 기업 수는 5백79개나 된다. 한진중공업이 지난 2006년 수빅에 조선소를 건립하면서 지난해까지 16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필리핀 투자 1위 국가에 올랐다. 한진중공업은 지금 민다나오 지역에 2기 조선소를 건설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 업체들은 지난해 1~9월 2억2천7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 규모로 보면 지난해 네덜란드와 영국에 이어 3위이다. 과거에는 전자나 섬유 같은 제조업종과 관광레저 분야의 비중이 높았으나 최근 전력, 에너지, 광물자원 개발 분야의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전력은 2036년까지 말라얀, 일리한, 나가, 세부에 4개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필리핀 전력 15%를 책임지는 2위 민자 발전 사업자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현대엔지니어링과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100개 협력사가 공동 참여하고 있다. 광물 자원 개발 분야에서는 LG상사가 광업진흥공사와 말레이시아 MSC와 손잡고 라푸라푸 구리 광산을 인수해 해마다 구리와 아연을 각각 1만1천t과 1만1천3백t을 생산할 예정이다. 포스코 판매 계열사 포스틸은 지난해 12월 코일센터 준공식을 마쳤다. 이외 삼성전자, CJ, 대덕전자, 삼성전기가 필리핀에서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은 인구의 35%가 절대 빈곤층이다. 중산층이 취약해 상품 시장은 고가(현대식 쇼핑몰)와 저가(재래시장)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대졸 초임은 3백 달러에 불과하다. 내수 시장을 공략하기에는 유효 수요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 투자자는 내수보다 수출에 치중한다. 필리핀은 총 수출의 65%를 외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총 수출의 60%를 차지하는 전자와 반도체 분야도 외국계 기업이 주도한다. 필리핀의 외국인 투자 규정은 까다롭다. 필리핀 헌법상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산업과 건설 부문은 외국인 지분이 40%를 넘지 못하고 토지 소유나 소매, 전문 서비스 부문의 외국인 투자는 금지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외국인 지분 40% 이하 기업에서도 외국인 직원 사장이나 관리자를 선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한국인 투자 기업에서 한국인이 사임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상거래 관행도 신속하지 못하다. 동일 제품에 대해서도 유사 제품과 비교하면서 시간을 지체하기 일쑤이다. 대형 프로젝트나 광산 사업에서는 브로커와 인허가권자 사이에 부조리가 만연하다.

그럼에도 필리핀은 한국인과 한국 기업에게는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고 있다. 필리핀은 지난해 초부터 한국-아세안 자유무역협정을 비준했다. 세부 분야별 실행 협상이 마무리되면 자유무역협정이 올해 본격적으로 발효된다. 갖가지 외국인 투자 제한 규정이 완화되면서 한국 업체의 투자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필리핀 정부는 한국 업체에 대해 호텔과 여행업 분야의 외국인 지분 제한 규정을 완전히 철폐하고 광산 개발·서비스·이동전화·위성서비스 분야도 개방할 예정이다. 엘메르 헤르난데스 필리핀투자청 부회장은 “필리핀은 서울, 도쿄, 상하이, 싱가포르, 홍콩까지 항공편으로 4시간 거리이고, 5억5천만명이나 되는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의 전초 기지로 유력한 곳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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