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등쌀에 워크아웃 기업 두 번 죽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2.24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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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설업계 1차 구조조정 후 잡음 무성 정부가 좀더 탄력적으로 조정에 나서야

▲ 강정원 국민은행장(가운데) 등 채권은행장들이 1월20일 건설·조선사 구조조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식이면 몽땅 죽는다. 선제적 대응을 하겠다며 시작한 구조조정이 기업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 2월18일 만난 한 조선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정부는 1월20일 건설 및 조선업계에 대한 1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옥석 가리기’를 통해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살리고, 그렇지 못한 곳은 과감히 퇴출시킨다는 것이 구조조정의 취지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현재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얽히고설킨 채권 금융 기관들의 이해 상충으로 인해 워크아웃 기업들의 회생은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몇몇 기업은 채권단의 ‘핑퐁 게임’ 속에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퇴출 단계인 D등급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정부가 내놓은 처방이 기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현재 “채권단에 구조조정을 모두 위임했다”라며 한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어정쩡한 상황에서 채권단의 ‘잇속 챙기기’는 갈수록 심해지고, 워크아웃 기업들의 한숨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채권단 간 잇속 챙기기에 ‘기업 살리기’는 뒷전으로 밀려나

당장 ‘발등의 불’이 떨어진 곳은 조선업계이다. 조선 왕국인 대한민국에서 어떤 조선사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라는 한탄이 나올 지경이다. 최근 해외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인 C&중공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은행·메리츠화재 등 채권단은 지난 2월9일 C&중공업의 제3자 매각안에 합의했다. 라자드와 미래에셋컨소시엄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고,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C&중공업은 D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지원이 어렵다. 매각 협상을 통해 M&A가 성사될 경우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C&중공업 내부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회사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채권단에 대한 불만이 잔뜩 고조되어 있다. 채권단이 서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책임을 미루면서 오리알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C&중공업은 지난해 11월27일 워크아웃을 신청해 6일 만인 12월3일 워크아웃 절차를 승인받았다. 이듬해 1월6일에는 삼일회계법인으로 실사 기관이 확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실사 기관이 정해지고도 전혀 실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원래 실사 기관이 정해지면 바로 실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름 동안 질질 끌면서 등급 판정 대상 회사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워크아웃 승인을 받은 기업이 어이없이 퇴출 등급인 D등급을 받아 회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라고 토로했다.

업계에서는 채권단의 실사가 미루어진 이유로 ‘선수금 환급 보증’(RG) 문제를 한결같이 지목한다. RG란 조선사가 의뢰받은 선박을 만들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다. 이 보험을 근거로 선주는 조선사에게 단계별로 자금을 집행한다. 만약 사고가 나 납기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손실액을 보험사가 대신 지불하게 된다.

문제는 이 보험의 성격을 채권단에서 달리 해석하며 혼선을 빚고 있는 점이다. 우리은행은 이 보험을 채권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반해 메리츠화재측은 RG를 보험으로 규정하고 있다. 채권단은 3차례에 걸친 협의회를 통해 긴급 자금 지원에 합의했다. 그러나 RG의 성격 규정에 따라 채권액 산정이 달라지면서 누가 많이 지불하느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다가 워크아웃이 무산된 것이다. 결국, C&중공업은 등급 분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사가 연기되면서 D등급을 받았다.

<시사저널>이 파악한 ‘C&중공업 채권 금액 및 의결권 현황’에 따르면 C&중공업의 경우 현재 1천6백억원의 지원 자금이 필요하다. 이 중 메리츠화재가 1천2백21억3천만원(채권 비율 76.33%)을 부담하고, 우리은행이 91억5천5백만원(채권 비율 5.72%)을 부담한다고 우리은행측이 채권단 협의회에서 밝혔다. 이에 반해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화재는 자사 부담은 전무(채권 비율 0%)하며, 우리은행이 3백86억8천3백만원(채권 비율 24.18%)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C&중공업 관계자는 “그동안 여러 차례 RG 보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옥신각신 입씨름만 하고 있는 채권단에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라고 지적했다.

현재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나머지 중소 조선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녹봉·진세·대한 등 많은 조선사들이 그동안 RG보험을 통해 자금을 수혈받았기 때문이다.

이미 상당수 중소 조선사들이 C등급을 받아 퇴출을 면하기는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실사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향후 회생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채영일 한국중소형조선협회 사무국장은 “워크아웃에 돌입한 대부분의 조선사들이 1천억원 이상의 RG에 묶여 있다. RG의 성격을 놓고 은행권과 보험사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지난 2월4일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어 이미 집행된 RG만을 채권으로 규정했다. “채권 금융 기관 간의 문제이다”라면서 물러서 있던 그동안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불씨는 여전하다. RG의 성격이 채권인지, 단순한 보험인지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사뿐만이 아니다. 건설사 역시 대주단에 가입했지만, 자금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대주단에 가입하면서 대외적인 신인도 추락과 함께 자금 지원도 받지 못하는 이중고에 빠져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2차 구조조정도 무의미”

▲ 서울 장교동 장교빌딩에 위치한 C&중공업 본사 사무실. ⓒ시사저널 박은숙

대동종합건설의 경우 워크아웃 대상인 C등급을 받았지만, 채권 은행들이 자금 지원을 거부해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대주단에 가입한 나머지 기업들 역시 실사가 늦어지면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조만간 단행될 예정인 2차 구조조정도 의미가 없다”라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채권단 내부의 첨예한 갈등이 근절되지 않는 한 기업을 살리겠다는 당초의 취지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박상수 LG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때도 채권 금융 기관 간의 이해 상충으로 논란이 있었다. 구조조정을 빨리 진행하려면 정부의 조정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구조조정과 관련해 정부가 전체적인 방향 설정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산업별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해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밑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윤증현 재경부장관이 최근 ‘산업 정책적 고려’ 발언을 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워크아웃을 진행 중인 채권단 관계자도 “정부나 채권단이 지금의 경직된 자세에서 벗어나 좀더 탄력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보험사가 수천억 원에 달하는 긴급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은행이 무조건 책임을 보험사에 떠넘기기보다는 보험사가 자금을 대출받아 이 돈으로 지원하는  현실적인 대안이 요구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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