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대공황으로 가는가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
  • 승인 2009.03.10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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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곳곳에서 유동성 함정에 빠진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에서 풀린 돈은 은행에서 막히고 은행 돈은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어떤 정책 수단도 먹혀들지 않아 경제가 헤어날 수 없는 깊

한국 경제 곳곳에서 유동성 함정에 빠진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정부에서 풀린 돈은 은행에서 막히고 은행 돈은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어떤 정책 수단도 먹혀들지 않아 경제가 헤어날 수 없는 깊은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3동에 사는 주부 안 아무개씨(40)는 최근 재래시장을 자주 찾는다. 얼마 전까지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1주일치 생필품을 한꺼번에 구입하던 것을 포기했다. 귀찮더라도 재래시장을 자주 찾는 것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외식은 삼가고 헬스클럽에 다니는 것도 중단했다. 안씨가 가계 지출을 크게 줄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2월. 남편이 휴직하면서 가계 수입이 불안해진 탓이다. 남편은 GM대우차 사무직 간부사원이다. 가계 수입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유급 휴직 상태여서 월급은 정상적으로 나온다. 노조가 노사 분규를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받기로 한 상여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안씨는 “남편 직장이 어찌될지 몰라 불안하다 보니 지출을 줄이고 있다.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되면 (남편이) 노조원이 아니라서 (고용과 관련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안씨는 얼마 전까지 자산운용사에 다니는 친지에게 여유 자금을 맡겼으나 지금은 모두 회수했다. 선물·옵션 투자라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이 자금은 예금자 보호 한도인 5천만원 단위로 나누어서 확정금리 11%를 보장하는 저축은행에 넣어두었다. 안씨는 “경기가 나아져 (남편 직장) 불안감이 사라지기 전까지 교육비를 제외한 지출은 없애고, 저축을 늘리는 데 치중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지금처럼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경기에서 소비 주체들의 현금 보유 성향은 커진다. 불확실성이 소비 성향을 억누른 탓이다. 기획경제부가 지난 3월5일 발표한 ‘최근 경제 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민간 소비는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4.4% 줄어들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지난 1월 소비재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3.1% 줄었다. 한두 가지 전문 상품을 파는 소매점 매출은 달마다 10%씩 떨어지고 있다. 지난 1월 설 특수 덕분에 16.8% 늘었던 할인점 매출은 지난 2월 -14.3%로 급락했다. 불안감을 확산시키는 주범은 고용 불안이다. 실업자가 지난 1월에만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0만3천명이나 늘어났다. 실업률은 3.6%까지 올라갔다. 실질임금은 2분기 연속 하락했다. 지난해 실질임금이 6.4% 줄자 소비재 판매액은 4.6% 떨어졌다.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가격도 지속적으로 떨어져 소비 부진을 부채질한다.

소비가 크게 줄어들면서 남는 여윳돈은 위험이 없는 안전 자산으로 옮겨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중앙부산상호저축은행에는 하루 5백명이 넘는 고객이 몰린다. 지난 한 달 동안 눈에 띄게 늘어났다. 평소에는 2백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창구 직원들은 오후 7시까지 일하기 일쑤이다. 영업 마감 시간은 4시30분이다. 중앙부산저축은행의 한 창구 직원은 “고객 한 명이 10개가 넘는 위임장을 들고 와서 5천만원씩 나누어 입금하는 일도 있다. 가족 구성원 명의로 하나씩 5천만원 예금 계좌를 만든다. 밀려드는 고객을 상대하다 보면 영업 마감 시간인 4시30분을 넘어 창구 밖 유리창 너머가 어두컴컴해져야 마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자료:Thomson Reuters, Datastream.

기업 보유 현금 자산 100조원…한국은행, 소비·투자 촉진 위해 기준금리 내려

예금과 달리 예금자 보호가 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안전 자산으로 분류되는 머니마켓 펀드(Money Market Funds)에도 뭉텅이 돈이 들어온다. 머니마켓 펀드는 만기 30일 이내의 초단기 금융펀드로 금리가 높은 만기 1년 미만의 기업어음(CP), 양도성예금증서(CD), 콜옵션 같은 단기 금융 상품에 집중 투자하는 펀드이다. 머니마켓 펀드는 은행의 보통예금처럼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하며 하루만 돈을 예치해놓아도 펀드 운용 실적에 따라 이익금을 받을 수 있다. 지난 2월에만 14조8천억원이 머니마켓 펀드에 들어왔다. 한국자산관리협회 조사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머니마켓 펀드에 들어있는 금액은 1백22조원이 넘는다. 5개월 만에 2배로 덩치가 커졌다. 이와 달리 주식형 펀드는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말 1백40조원에서 올해 1백38조원으로 2조원가량이 빠져나갔다. 모건스탠리증권 리서치센터는 한두 달 안에 머니마켓 펀드 자금이 주식형 편드를 앞설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찬익 모건스탠리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3월4일 발표한 ‘국내 펀드 흐름이 위험 회피 성향을 유지하고 있다’라는 제목의 한국 투자 전략 보고서에서 ‘단기적으로 환율 움직임이 불안정하고 변동성이 커지면서 투자 자금이 머니마켓 펀드 같은 안전 자산을 주목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머니마켓 펀드에는 가계 자금만 들어간 것은 아니다. 기업도 여유 자금을 설비 투자나 연구·개발 투자에 쓰지 않고 머니마켓 펀드에 집어넣고 있다. 박상운 FW애셋투자자문사 대표이사는 “머니마켓 펀드에 있는 자금 가운데 기업 자금이 상당하다”라고 말했다.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자산 규모는 10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2008년 3분기 말 현금성 자산 보유 현황’(52쪽 도표 참조)에 따르면, 국내 상장법인 5백59개사가 지난해 9월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71조원에 이른다.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4.86% 늘어났다. 이 수치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인해 촉발된 금융 위기가 터지기 전에 조사되었다. 올해 3월 말 주요 기업 결산 자료에 담길 현금성 자산 규모는 100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 현대중공업, SK, 롯데,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출자총액제한 기업집단에 속하는 10대 그룹이 지닌 단기 유동 자금이 100조원에 이른다는 추정까지 나오고 있다. 이 탓에 지난해 4분기 설비 투자는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4%나 줄어들었다. 지난 1월에만 국내 기계 수주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반 토막(47.8% 감소)이 났다. 공공 기관이나 공기업 부문이 52.4%나 기계 수주를 늘렸는데도 민간 부문 수주 감소폭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2월12일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2%까지 내렸다. 지난해 10월 5.25%였던 금리를 4개월 만에 2%로 떨어뜨리는 전무후무한 조처를 단행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또 은행에 유동성을 풍부히 공급하고 있다. 시중 은행의 대출 여력을 늘려 설비 투자 자금이 필요한 기업으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려는 뜻이다. 금융 기관 버전의 ‘트리클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적하 정책)를 기대한 것이다. 트리클다운은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신다는 뜻으로 시중 은행에 유동성을 넘쳐나게 공급하면 기업과 소비자에게 대출이나 투자 형태로 돌아가 경기를 자극하게 된다. 하지만 시중 은행은 대출을 줄이고 있다. 담보 여력이 충분하거나 부실 위험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만 선별적으로 대출을 허락할 뿐 남는 자금은 다시 한국은행에 예치하고 있다. 금리를 낮추고 통화량을 늘리는 통화 금융 정책이 먹혀들지 않고 있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웬만한 통화 금융 정책이나 재정 지출 확대 정책으로는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유동성 함정이라 지칭했다. 실업률 증가, 자산 가치 폭락, 불확실성 증가로 인해 가계나 기업이 현금을 보유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을 무한 공급해도 소비와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다. 유동성 함정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는 것이 디플레이션이다. 강민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를 고착화하고 금융시장 기능을 마비시켜 인플레이션 이상으로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불황을 겪었다. 일본은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떨어뜨려 돈을 시중에 무한히 공급했으나 소비나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통화량 증가분이 은행 창구 안에서만 맴돌았다. 정부가 가장 꺼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통화 금융 정책이 먹히지 않으면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재정 지출 확대 정책이다. 가계와 기업이 돈을 쓰지 않으면 정부가 쓰겠다는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검토하고 있는 ‘슈퍼 추경 30조원’이 대표 사례(54쪽 부속 기사)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추가 경정 예산 가운데 일부를 서민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타이완 당국은 지난 1월 26억 달러를 책정해 국민 1인당 100달러씩 나누어주기도 했다. 현금이나 상품권 지급은 정부가 급격한 경기 위축을 막기 위해 동원하는 마지막 정책 수단이다. 여당 대표가 현금 지급을 언급할 정도이니 경기 위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정부가 뒷짐지고 있어야 하겠는가? (슈퍼 추경 같은 정부 지출 확대 정책은) 금융 정책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판단하니까 재정정책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경제 정책은 청와대 경제수석이 보고하기 전에 기획재정부·한국은행·금융감독위와 협의과정을 거쳐 합의안을 만들면 청와대 수석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박병원 전 경제수석은 “이대통령은 부처 사이에 이견이 없으면 대체로 부처가 합의한 정책을 채택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재정 지출 확대 정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경제 부처 사이에 정책 기조를 금융 정책에서 재정 정책 위주로 전환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정부 재정 지출 확대 논의…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 작다는 지적도

국내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강민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금까지 추이를 볼 때 한국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은 낮다”라고 말했다. 현금 보유 성향이 장기 평균보다 낮고, 지난 1월 근원물가 상승률이 5.2%로 높기 때문이다. 2%인 기준금리를 추가로 내려 경기 부양을 꾀할 수 있다. 정부가 이미 계획한 감세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재정 지출을 비약적으로 늘리면 경기 침체를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막는 방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국내 경제가 유동성 함정이나 디플레이션에 빠질지, 아니면 회생할지를 결정할 결정 변수는 바다 너머에서 찾아야 한다. 강민우 수석연구원은 “세계 경제 위기가 심해지거나 국제 유가가 치솟는 것과 같은 돌발 변수가 발생해 전세계 차원의 공황으로 확산되면 한국 경제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3월 경제 동향 보고서에서 ‘세계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소지가 있고 국제 금융시장 불안이 재연할 위험이 상존한다’라고 지적했다. 전세계 경제는 동유럽 외환 위기가 제2, 제3의 금융 위기를 촉발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경기 불안이 해소되려면 진원지인 미국 경제가 불황 탈출의 기미를 보여야 한다. 미국인 못지않게 전세계가 오바마플랜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56쪽 부속 기사 참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7천8백70만 달러를 조기 투입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 부양책은 지난 2월13일 우여곡절 끝에 의회를 통과했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2월10일 2조 달러에 이르는 금융 안정책을 발표했다.

세계 각국 정부는 이제 예상하지 못했던 무기력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갖가지 경제 정책을 동원해도 경기 부양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미국의 경기 부양책이 성공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국내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46%나 되는 한국 경제는 말할 것도 없다.

(단위:억원, %) 출처:증권선물거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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