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 넘어도 미모·인기 그대로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3.1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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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인형 탄생 50주년, 150개국에서 10억개 팔려…“플라스틱 자본주의 공주” 비판도

▲ 바비인형과 똑같은 복장을 한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교포 피터 한씨(63)는 요즘, 당첨된 복권을 잃어버린 듯한 황망한 감정에 싸여 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친지에게서 기념품으로 받았던 바비 인형이 사라진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재 벽장에 두었던 인형을 아내가 며칠 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장난감 제조 수입회사인 마텔(Mattel) 사의 1959년산 바비 인형. 이 인형은 지금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고 2만7천4백50달러(약 4천2백만원)까지 호가하고 있다.

마텔의 바버라 밀리센트 로버츠는 지난 3월9일로 나이 50세가 되었다. 할리우드 1급 스타들이 사는 최고급 주택지인 로스앤젤레스 서쪽 태평양 연안 말리부의 바닷가 절벽에 새로 집을 마련했다. 전용 면적 3천5백스퀘어피트(약 1백5평)짜리 주택에서 생일 축하파티 겸 집들이를 했다. 부동산업자들이 추정하는 이 집의 가격은 적어도 5백만 달러(75억원). 핑크색 위주로 꾸며진 집에는 굽 높은 핑크색 하이힐 50켤레를 비롯해 바버라의 각종 의상이 옷장에 담겨 손님들을 맞고 있다. 현대 최고 전위예술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앤디 워홀이 바버라를 모델로 제작한 실크스크린의 진품도 걸려 있다. 차고에는 핑크색 폴크스바겐 뉴비틀이 있다.

바버라는 실물에 비해 6분의 1로 줄여 제작된 키 11.5인치(약 29㎝)짜리 패션 인형 바비이다. 바비 인형이 지난 50년간 꾸준히 명성을 유지하면서 바비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그 이야기 속에서 바비의 공식 이름은 바버라 밀리센트 로버츠가 되었다. 마텔은 바비가 생명이 없는 단순한 플라스틱 인형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의 하나로 말리부에 ‘바비 드림 하우스’(꿈의 집)를 짓는 구상을 해왔고, 마침내 실현했다.

마텔이 바비의 생일을 성황리에 치른 것은 단순히 반세기 동안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고 생존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마텔은 바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키우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벌여야 했다. 경쟁사나 모방품을 팔고 있는 장난감 회사와 전쟁을 하며 살았다. 특히 지난 10년간 매달 평균 1건씩 상표권이나 특허권을 둘러싼 법률 시비를 겪어야 했다. 바비의 이름이나 모양, 관련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 확인될 경우 마텔은 가차없이 대응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런 마텔을 두고 ‘세계 상표권 전쟁에서 가장 공격적인 회사’라고 불렀다.
 
마텔의 사투는 단순히 법률적 시비를 가리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연간 매출액 15억 달러에 이르는 라이선스 보호를 위해 직원 100명을 동원해 계약 회사 8백개를 감독하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바비 인형은 매년 새로운 버전이 생산된다. 새 버전을 내놓는 회사 내 디자인 부서에는 냉전 시대의 소련 크렘린을 무색케 할 정도로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다. 바비를 전담하는 일급 디자이너 숫자만 50명에 이른다. 바비의 새로운 버전 작업을 맡고 있는 헤어드레서는 무려 12명이다.

패션 인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비를 장식할 패션 제품도 9백종이나 된다. 드레스는 물론 모자와 리본, 구두, 핸드백, 자동차, 애완동물 등이 포함된다. 의상 디자인에는 세계 최고 명성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한다. 한국에서 명품의 대명사로 알려진 아르마니, 지방시, 캘빈 클라인, 도나 카렌, 디오르, 베르사체,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이 바비 의상과 액세서리를 맡고 있다.

마텔은 또, 심리 전문가 30명을 고용해 연간 10만명을 대상으로 현장 인터뷰를 실시한다. 바비에 대한 어린이와 부모들 그리고 어릴 때 바비와 함께 자란 성인 여성들을 상대로 조언을 들어 바비의 개선점을 연구한다.

라이선스 지키기 위한 직원만 100명

마텔이 바비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마텔이 생산 판매하는 제품은 장난감 65종, 게임 20종, 전자장난감 6종 등 모두 91종에 이른다. 이들 장난감 판매에서 올리는 연간 매출 약 60억 달러(9조원) 가운데 바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절반을 넘는 33억 달러에 달하고 전체 순익에서는 8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비는 마텔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바비는 지난 1959년 시장에 처음 출시되어 36만개가 팔리는 대박을 터뜨린 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모두 10억개가 팔려나갔다. 마텔은 전세계에서 1초에 3개씩 바비가 팔린 것으로 계산한다. 현재 세계 1백50개 국가에서 바비는 같은 이름으로 시장에 나와 있으며, 미국 내 보유량은 3억이 넘는 전체 인구보다 많다.

미국의 3세에서 10세 사이 여자 어린이 가운데 90%가 적어도 한 개씩 바비 인형을 갖고 있다. 미국의 여자 어린이 거의 전부가 바비와 함께 자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학계에서 바비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다.

최근 연구는 바비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와 바비를 가지고 놀며 성장한 여성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연구 결과로 미국 사회에 바비 신드롬(증후군)이라는 새 용어가 등장했다.

왜곡된 신체 비율은 ‘걱정거리’

증후군의 하나는 바비 인형이 갖는 신체 구조 비율에서 온 것이다. 바비 인형의 가슴-허리-엉덩이 사이즈는 38-18-34이다. 바비의 다리는 길고, 그래서 늘씬해 보인다. 인체 구조상 미국인의 다리는 팔 길이의 1.2배 정도가 정상인 데 반해 바비의 경우는 1.5배에 이른다. 이런 바비가 야윈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10세 안팎의 어린이들은 바비의 신체 비율을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바비를 닮기 위해 어려서부터 다이어트에 예민해져 있다고 연구자들은 걱정한다. 핀란드의 한 연구소는 바비의 신체 구조 비율이 여자로서 출산을 할 수 없는 위험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둘째 증후군은 의상에서 나온다. 세계 최고급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바비 의상은 주로 핑크색이 주류이기는 하지만 색깔이나 디자인 그리고 코디네이션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따라서 10대 시절 바비를 침대 옆에 두고 자란 미국 소녀들의 의상에 대한 감각은 예전에 비해 수준이 훨씬 높다. 고급 디자인을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접하는 아이들이 자라나 성인이 될 경우 의류시장에 미칠 영향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다른 증후군은 바비의 직업에 관한 것이다. 바비는 그냥 귀여운 공주나 멋진 소녀가 아니다. 항공기 스튜어디스에서 파일러트, 의사, 간호사, 교사, 대학교수, 여자 경찰, 우주인, 야구선수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현재 바비가 갖고 있는 직업은 100여 개나 된다. 여자 어린이들은 바비의 직업을 통해 자신의 직업관을 키운다.

특히 가난하고 여성이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나라에서 여자 어린이들은 바비의 직업을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혁명적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바비가 미국을 비롯해 세계 1백50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롤 모델이 되면서 이들에게 미치는 정신적·경제적 영향도 적지 않다. 바비를 ‘서방 소비자본주의 심볼’이라거나 ‘플라스틱 자본주의 공주’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바비 신드롬은 찬사와 비난을 함께 불러일으킨다. 찬사는 바비가 이미 세계에 미국을 판매하는 아메리칸 아이콘으로 위치를 확고히 함으로써 그 영향력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출판사 하퍼스가 내놓은 ‘가장 영향력이 큰 1백1명의 비생존 인물’ 가운데 바비가 43위를 차지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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