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선점에 인정사정 없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3.1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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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분야 분쟁 건수 2년 만에 3배 증가 일각에서는 ‘경쟁사 죽이기’ 지적도

▲ 청주산업단지 내 하이닉스 청주 공장에서 직원들이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KTF는 최근 특허청을 상대로 투쟁 중이다. 이 회사가 등록한 ‘쇼(show)’의 부가서비스 신청을 지난해 말 특허청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KTF측에서 요구한 부가서비스를 보면 의류, 신발, 공연 등 2백여 가지에 이른다. 이동통신사의 사업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허청이 결국, 서비스 등록을 거절하자 KTF는 이에 불복해 특허청측 결정의 부당성을 가려달라는 심판을 대법원에 청구했다.

회사 관계자는 “부가서비스 등록이 바로 사업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업에 뛰어들 경우 추가 비용이 지출될 수 있어 이에 대한 선제 대응 차원에서 부가서비스 등록을 신청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동통신업계에서는 이런 조치를 치열해지고 있는 ‘불황 마케팅’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동통신 수요자는 이미 포화 상태에 놓여 있다. 수익 창출을 위해서는 번호 이동 등을 통해 경쟁사 고객을 빼앗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아야 한다. KTF가 새로운 수익 모델 확보를 위해 특허 신청을 냈지만 특허청이 제지하자 법원에 호소하는 ‘강수’를 둔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특허 관련 물밑 신경전 치열

LG전자는 지난해 말 대우일렉을 상대로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우일렉이 판매하고 있는 세탁기 ‘클라쎄’가 자사의 트롬 세탁기 기술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석연치가 않다. LG전자는 지난 2007년 6월 대우일렉을 특허청에 제소했다. 당시 특허청이 대우일렉의 손을 들어주자 이번에는 또 다른 기술의 침해를 이유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경쟁사 손보기’가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LG전자측은 “이번 특허 싸움의 계기는 단순히 매출이나 시장 점유율을 빼앗겨서가 아니다. 드럼 세탁기 기술은 최근 해외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대우일렉이 비슷한 종류의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면서 기술 정체성이 애매모호해졌다. 방치할 경우 해외 업체들마저 무분별하게 관련 기술을 베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강경 대응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우일렉측은 “불복 심판이라는 특허청 절차를 무시한 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LG전자가 소송을 제기한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이나 유럽에서 사용하면서 범용화된 것이다. 후발 주자인 우리가 최근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자 견제에 나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특허 전쟁은 조선·화학·물류 등 곳곳의 산업 현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경쟁사인 대우조선해양을 상대로 특허 무효 심판을 특허청에 청구했다. 대우조선이 가지고 있는 LNG선의 발라스트 탱크(선박의 균형과 복원성을 위한 장치) 연결 기술 특허권이 무효라는 것이 이번 심판 청구의 취지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발라스트 탱크의 저호퍼 연결 구조는 업계에서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기술이다. 대우조선이 특허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아 심판 청구를 하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우조선측은 “이 기술은 기존 방식의 취약함을 보완한 새로운 것이다. 조선업계에서는 요즘 경쟁사의 기술을 깎아내리기 위해 ‘일단 걸고 보자’라는 식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밖에 금호아시아나도 현재 대학과 특허 관련 분쟁을 벌이고 있다. 한경대학교 산학협력단은 지난해 말 금호산업을 상대로 ‘유기성 폐기물 처리 및 바이오가스 생산 장치 특허 무효 심판을 특허청에 청구했다.

이렇듯 특허 분쟁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기술 방어’를 해놓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허청에 접수된 국내 기업의 특허 분쟁 건수는 지난 2006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 2005년 5백41건에 불과하던 것이 2006년 9백60건, 2007년 1천1백15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올 들어 특허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특허청의 전언이다. ‘기술이 곧 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사소한 기술에도 일단 소송을 걸어 선점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이 특허청의 ‘특허정보 서비스’를 통해 검색한 결과 삼성그룹의 경우 올해만 68건의 심판 청구를 특허청에 제기했다. LG그룹 역시 62건의 심판 청구를 했다. 특히 LG그룹의 경우 LG패션, LG데이콤 등 주요 계열사들이 거꾸로 8건이나 특허를 침해했다고 해서 심판 청구 대상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SK, 한화, GS, 포스코, KT 등도 10개 안팎의 특허 관련 분쟁을 겪고 있다.

특허청 관계자는 “특허 무효 심판 청구는 소송과 다르다. 특허 관련 심판 청구가 모두 소송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삼성의 예를 보면 올해 발생한 분쟁 중 3건을 제외한 59건이 특허청 결정에 대한 불복 심판을 요청한 것이었다. LG그룹 역시 총 62건 중에서 49건이 불복 심판이었다. 재벌 기업들이 특허 문제에 얼마나 민감하게 대처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국내 기업을 상대로 한 해외 기업들의 소송도 줄을 잇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 경쟁 업체로부터 특허 소송을 당한 사례가 지난 2006년 12건에서 지난해 23건으로 급증했다. LG전자 역시 30건에서 40건으로 25% 증가했다.

‘해외발’ 특허 소송도 증가…정부·재계 함께 대책 마련해야

AMD와 후지쯔의 합작회사인 스팬션은 최근 미국 연방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 주 지방법원에 삼성전자를 제소했다. 삼성전자가 특허를 침해한 메모리를 판매해 3백억 달러 이상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이유에서이다. 비슷한 기간에 이스트만 코닥은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자사의 기술을 도용해 카메라폰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프의 경우 LCD TV와 모니터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면서 삼성전자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기도 했다.

삼성이나 LG 등 해당 기업측은 “특허 문제로 인한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련 부서의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컨버전스 제품을 출시하는 상황에서 특허 소송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라고 항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기업들의 위상이 높아지자 글로벌 기업들의 견제가 강화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엠에이피에스 특허법률사무소 조욱제 변리사는 “최근 해외 기업의 특허 관련 소송이 빈발하는 것은 국내 업체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면서 견제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에도 이같은 특허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정부나 재계가 함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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