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환, 요란한 마중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9.03.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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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전 의원 귀국 앞두고 팬클럽 활동 부쩍 늘어…여권 지형에 어떤 변화 몰고 올지 주목

▲ 왼쪽은 미국 여행길에 아이젠하워 기념관을 찾은 이재오 전 의원. 오른쪽은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재오사랑’ 서울 지역 발대식. ⓒ연합뉴스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귀국이 임박하면서 여권 안팎에서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하기까지의 일등 공로자이자 대선 승리의 핵심 공신인 그의 귀국은 분명 여권 내 구도를 뒤흔들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권 내 지형도는 이 전 최고위원이 미국으로 향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다. 그가 힘을 쓸 수 있는 여지는 과거보다 좁혀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강한 조직력과 특유의 추진력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권 내부를 새롭게 정리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한 고위 인사는 “이 전 의원의 귀국을 앞두고 그의 팬클럽인 ‘재오사랑’ 지부가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월 말에는 ‘재오사랑 경기지부 발대식’이 있었다. 2월에는 강남지회 발족식도 열렸다. 이들 외에도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방 이곳저곳에서 지부가 속속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오사랑 회원은 현재 7천8백여 명에 달한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만한 팬클럽을 갖고 있는 정치인도 드물다. 귀국을 앞두고 미국 일주 여행에 나선 이 전 의원은 ‘재오사랑’에 여행기를 올리고 있다. ‘재오사랑’은 회원 숫자 1만명을 채우자는 ‘야심만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재오사랑’ 황현대 회장은 “강원과 전북을 제외하고는 지부가 다 결성되었다. 순수 팬카페이기에 정치적인 활동을 할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귀국 후 정치와 거리 둔 다는 방침에 변화 없어”

이 전 의원의 한 측근은 “귀국 후 조용히 지내며 정치와 거리를 둔다는 기본 방향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른 맥락이 없다. 재오사랑의 움직임은 순수 팬클럽 활동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에 대해 벌써 걱정하고 경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 친이명박계 의원은 “이 전 최고위원은 귀국 이후 책을 쓰면서 정치와는 거리를 두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과 그와 가까웠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세력화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 전 의원의 성향으로 볼 때도 정치와 거리를 두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걱정된다. 오해받기 쉽다”라고 우려했다. 내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출마를 노리는 사람 등이 그의 주변에 몰리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전 의원이 떠날 때와 달리 지금 여권의 권력 지형은 대구·경북(TK) 세력을 중심으로 흐름이 잡힌 상태이다. 이상득 의원과 최시중 방통위원장, 박영준 국무차장이 중심이 된 이런 구조는 나름대로 강고한 힘을 갖고 있다. 청와대는 이런 구조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이상득’으로 상징되는 원로·TK 세력과 이 전 의원의 관계는 어쩌면 숙명적으로 일정한 갈등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따르는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사 문제 등과 관련해 충돌이 불가피하다. 올 들어 그를 만난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 전 의원이 이상득 의원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라고 전했다. ‘이상득’이라는 코드에 대해서는 이 전 의원과 정두언 의원으로 상징되는 친이계 소장파가 뜻을 같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이재오-정두언 연합군이 형성되어 일대 공세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정국 흐름과 지형에 대해 이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일반의 생각보다 훨씬 비판적이다. 현재의 주류 그룹이 역사의식이나 소명 의식이 없이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지난 2월9일 베이징에서 이 전 의원을 만났을 때도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오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원이 지난 3월18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이재오 전 의원은) 정권 창출에 크게 기여한 분이고 소중한 한나라당의 자산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라고 말한 대목과 맥락이 연결된다. 본인이 거리를 두려고 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고,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관측인 것이다. 정의원은 의미를 묻자 “사람들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겠느냐?”라고 되묻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여권 내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갈등이 커질 수 있다며 이 전 의원의 귀국을 둘러싸고 걱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반기는 흐름도 엿보인다. 그가 일종의 ‘메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꾸라지 속에 메기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살아남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듯 이 전 의원의 귀국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여권 각 세력 간에 긴장감을 높여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소리가 나더라도 크게 보면 여권의 결집을 강제하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고, 이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를 하나 더 확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정가에는 ‘이재오 역할설’과 관련해 ‘대북 특사설’이 돌았다. 그가 베이징에 있을 때 북한 인사를 접촉했고, 미국에 체류할 때도 북한 사정에 밝은 한 교수의 도움으로 북한과 관련한 이런저런 공부를 하고 네트워크를 쌓았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가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머무를 때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번영 공동체’ 구상을 제시한 것도 한 자락 덧붙여졌다. ‘이재오 구상’은 한마디로 한반도를 거쳐 중국, 러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3개 철도 노선을 연결해,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고 경제적 번영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이 주장하는 ‘북방경제권 구상’과도 연결되고,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구상과도 선이 닿는다.

이 전 의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북한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라고 말한 것도 그의 ‘대북 특사설’과 관련해 주목되었다. 그와 가까운 이군현 의원도 BBS에 출연해 “충분히 검토 가능한 카드이다”라고 거들었다. 과거에도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특사를 보내 돌파구를 뚫었다는 점에서 ‘이재오 대북 특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재오 대북 특사설’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하나의 ‘구상’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가 여전히 이에 부정적이고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 한다’라는 인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국대 고유환 교수는 “신뢰 회복이 전제되지 않는 특사 파견은 불가능하다”라고 분석했다.

이 전 의원의 귀국은 집권 2년차를 맞은 여권 내부의 권력 관계는 물론 향후 정국 운용과 관련해서 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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