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살리기’, 천신일도 뛰었다
  • 소종섭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9.04.0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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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구명을 위해 추부길 전 비서관 외에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여권 ‘원로 그룹’의 핵심 인물로 꼽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도 여권 요로를 상대로 움직이다가 청와대의 제지를 받은

ⓒ연합뉴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각종 게이트성 사건이 많았지만 ‘박연차 게이트’야말로 게이트 사건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이고 검사·판사·변호사·경찰·기업인·국세청 인사까지 연루된 각계 인사가 수십 명에 달한다. 로비 수법도 온갖 행태가 다 망라되어 있다. 골프·식사 접대는 기본이다. 현금을 주거나 달러를 안기기도 하고 신발을 후원하기도 했다. 로비 장소도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걸쳐 있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본인이 직접 나서기도 했고, 지인이나 측근을 통해 돈을 건네기도 했다. 관련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박회장이 주로 움직였던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이곳을 거쳐 간 주요 인맥들이 초토화되고 있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를 맞으면서 본격화한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정치권에 판도 변화를 불러오면서 향후 대선 구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치권 정풍’을 거론하며 이번 사건을 유리하게 활용하고 수사 이후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이인규 중수부장’의 첫 번째 작품인 이번 수사에 대해 여론은 ‘성역 없는 수사’를 주문하고 있다. 정치권의 부패 고리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도려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대상에는 과거 정권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도 포함된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수사가 올 상반기까지 이어지면서 흐름을 주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수사를 통해 ‘노무현 그룹’은 직격탄을 맞았다. ‘봉하대군’으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가 각종 수뢰에 관련되어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광재·서갑원 의원 등 직계 386 인사들과 민정수석을 지낸 박정규 변호사 등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향후 ‘노무현’을 내세우고 정치적으로 재기하기에는 난관이 예상된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50억원 수뢰 의혹’에 휘말려 있다. 칼끝이 노 전 대통령에게 향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부산·경남 지역 정치권은 공황 상태이다. 거의 대다수의 정치인이 박회장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주류를 형성해왔던 한나라당, 특히 친박근혜계 세력은 ‘박연차 게이트’로 인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의도 여부에 관계없이 부산·경남의 전통적인 주류 그룹이 신진 세력으로 바뀌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김혁규 전 경남지사, 김태호 현 경남지사, 권철현 주일대사, 한나라당 허태열·권경석 의원 등의 이름이 나왔다. 친박근혜계 중진 의원의 연루설도 파다하다.

문제는 현 여권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는가, 검찰이 과연 말 그대로 성역 없이 수사할 것인가이다. 권력 변화에 민감했던 박회장이 2007년 이후 권력의 추가 ‘이명박’에게 쏠렸던 상황에서 팔짱만 끼고 있었을까.

▲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3월23일 구속되었다. ⓒ연합뉴스

<시사저널>, 노건평-추부길 핫라인 이미 보도

3월27일 현재까지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구속된 현 정권 핵심 인사는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유일하다. 추 전 비서관은 지난 3월23일 박회장측으로부터 현금 2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를 잘 봐달라”라는 명목으로 지난해 9월 박회장의 측근인 정승영 정산개발 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지난해 7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되었다.

얼핏 보면 추 전 비서관과 박연차 회장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공통분모가 없다. 두 사람을 잇는 고리는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이다. <시사저널>은 이미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노건평-추부길 핫라인 있다’ ‘검찰, 노무현 정권 심장 겨누나’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관계와 박연차 회장을 위해 두 사람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시사저널> 제996·998호 참조). 두 사람은 2007년 대선 이전부터 인연을 맺어 정권이 바뀐 뒤에도 수시로 만나거나 통화하면서 이런저런 논의를 해왔다. 추 전 비서관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5~17대 총선 때 이의원의 선거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전에 이상득-노건평 만남이 있었다는 얘기도 돌고 있다.

추 전 비서관이 구속된 뒤 관심사는 그가 박연차 회장을 구하기 위해 여권 핵심부를 상대로 실제로 움직였는가이다. 검찰은 이에 대해서도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여권의 한 핵심 소식통은 추 전 비서관이 실제로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10월 중순 한나라당의 한 친이명박계 의원을 만나 청와대 고위 인사에게 얘기해 박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라는 것이다. 당시 추 전 비서관을 만난 것으로 알려진 의원은 익명을 전제로 그와 만난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세무조사를 중단하게 해달라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추부길, 박연차 구명 위해 적극 힘써

이와 함께 추 전 비서관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청와대 핵심 인사를 상대로도 움직인 정황이 있다. 다른 쪽으로는 직접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접촉하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국세청에 영향력이 큰 전직 고위 인사를 통해 한 전 청장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추 전 비서관이 제3자를 통해 한 전 청장을 접촉한 것으로 안다. 이와 관련해 박회장측은 5억원을 내놓은 것으로 안다. 추 전 비서관이 2억원을 받았고, 나머지 3억원의 행방이 묘연하다. 관련자 누군가에게 건네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난해 가을 추 전 비서관은 한나라당·청와대·국세청 등을 상대로 인맥을 총동원해 ‘박연차 구명’에 나섰다. 현 정권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사가 전 정권과 유착했던 기업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에 당시 여권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입에 오르내렸을 정도이다.

추 전 비서관이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기는 했지만, 현 정권의 중심 그룹에 들어 있는 인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해 6월 그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그만두게 되는 과정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그가 비서관이 되면서 청와대 안팎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청와대 민정팀이 이런 점에 주목한 것이 그가 비서관직을 그만두게 된 한 이유였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추 전 비서관은 정권 출범 직후부터 주목 대상이었다”라고 말했다. 동생을 거치기는 했지만 박연차 회장의 돈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의혹을 산 이종찬 전 민정수석도 정치적인 위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추 전 비서관과 유사하다. 

하지만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은 이들과 다르다. 그는 이상득-최시중-박희태 등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좌우하는 ‘원로 그룹’에 속한 핵심 인사이다. 천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동기이고 현재 고려대 교우회장을 맡고 있다. 박연차 회장과는 수십 년 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천회장의 동생과 박회장이 절친한 친구 관계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천회장의 담장 밑에 지붕을 대고 박회장이 사업을 시작했다”라는 말로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을 설명했다. 3월22일 MBC <뉴스데스크>는 ‘지난해 9월 말 박회장의 계좌에서 10억원의 뭉칫돈이 기업인 C회장에게 빠져나갔다’라고 보도했다. 다음 날 조선일보는 ‘천신일 회장과 이종찬 전 민정수석 등이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와 검찰 고발을 막기 위해 수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라고 보도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수행 경제인들과의 조찬간담회에서 천신일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좌추적에서 천회장 관련 큰 건 나왔다”

사정기관의 한 정통한 소식통은 ‘박연차 구명 로비’와 관련한 천회장의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세청이 전격적으로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에 들어가면서 박회장이 천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천회장이 여권 요로를 상대로 움직이는 초기 단계에서 체크가 되었다. 청와대가 천회장에게 ‘손을 떼라’라고 경고해 천회장의 발이 묶였다.

그 후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안다.” 천회장도 나름으로 박회장을 위해 움직이다가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주목되는 것은 여권 내부에서 지난 대선을 앞두고 거액의 돈이 캠프에 흘러들었고 그 막후에 천회장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한 국회의원은 “당시 캠프 내에서 ‘우리가 쓰는 돈이 혹시 박연차 회장에게서 온 것 아니냐’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살림이 빡빡했는데 어느 순간 트였다”라고 전했다. 천회장이 여권의 대선 자금과 관련해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그가 단순히 대통령의 동기이고 친하다는 것만 가지고는 그의 파워를 설명하기 부족하고 ‘자금’과 관련 있는 실질적인 ‘대선 공신’ 중 한 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자락이 박회장과 연결되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이에 대해 천회장은 주변에 “박회장과 나 사이는 부탁을 하면서 돈이 오가는 관계가 아니다”라며 결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저널>은 이와 관련해 천회장측에 메모를 남겼으나 연락이 없었다.

박회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은 진술하면서 천회장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칼을 가까이 들이댈수록 상대적으로 천회장에 대한 압박도 세질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인사는 “계좌 추적 과정에서 천회장과 관련 있는 ‘큰 것’이 나온 것으로 안다. 결국, 소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천회장의 운명은 여권의 또 다른 실력자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시각이다. 자칫하면 정권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 정권을 초토화시킨 ‘박연차 게이트’는 ‘천신일’을 매개로 여권의 담장 위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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