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친노 ‘동시 타격’ 노렸나
  • 김영화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09.04.0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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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 출신 인사·민주당 의원 등이 다수 포함돼 설 분분…정치권 지형에 큰 변화 몰고 올 듯

▲ 검찰 조사를 받은 후 3월26일 구속 수감되는 민주당 이광재 의원. ⓒ시사저널 임영무

검찰의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인해 여의도 정치권은 현재 폭풍전야이다. 매일 아침 조간 신문에 박연차 로비 의혹으로 여야 정치인과 정·관계 인사의 이름이 새롭게 등장하고, 일부 현역 의원은 이미 검찰 소환 통보를 받거나 받을 예정이어서 하루아침에 교도소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걷는 신세가 되었다.

당연히 정치권의 관심은 과연 이번 수사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에 쏠려 있다. 특히 전 정권 핵심 인사는 물론이고 현 정권 중진 의원 이름도 줄줄이 거명되자 “도대체 검찰 수사의 저의가 뭐냐”라는 의문이 팽배해 있다.

한나라당은 표면적으로는 “여야 가리지 말고 대상이 그 누구라도 증거가 있을 때에는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홍준표 원내대표)라는 ‘법대로 사정’을 강조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계파에 따라 온도 차가 난다.

당연히 친박근혜계는 이번 수사가 목에 걸린다는 분위기이다. 현재 박연차 회장의 정치권 로비 대상으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그의 사업 근거지인 부산·경남(PK) 출신 인사들이 주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친박계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친박계 핵심 인사로 분류되는 허태열 최고위원이 ‘박연차 리스트’ 인사로 이미 거론된 상태이다. 정치권에는 친박계의 또 다른 중진 인사 2명도 사정의 가시권에 들어 있다는 설이 흘러나오고 있어 친박측이 적잖게 긴장하는 모습이다.

허최고위원은 “지난 10년 동안 박회장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없다. 혹시나 싶어 샅샅이 뒤져봤지만 박회장의 후원금을 받은 적도 없다”라고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조차 펄쩍 뛰고 있다. 또 다른 중진인사 2명도 “박연차 회장과는 일면식도 없다”라고 의혹을 부인한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친박 죽이기’설은 실체가 있다기보다 가능성의 영역에서 거론되는 정도이다. 특히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허최고위원과 동시에 거론된 권경석 의원은 친이계로 분류되고 있어 수적으로는 친이·친박 간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친이계의 핵심 이너서클에 속해 있던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이미 구속되었고,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도 로비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친박 죽이기’는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친박계 내부에서는 청와대가 박연차 리스트 정국을 이용해 여권 내부의 권력 지형 변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여전히 꽈리를 틀고 있다. ‘월박(越朴)’ ‘복박(復朴)’ ‘주이야박(晝李夜朴)’ 같은 신조어가 나오는 등 당내 기반이 친박 쪽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자 친이측이 견제에 나서지 않았느냐는 의혹의 시선을 선뜻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곳곳에 친이와 친박계의 대립 전선이 형성되어 있어 정권 운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불만이 친이 진영에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친박계의 한 인사는 “청와대가 꼭 친박계 의원을 노리지 않았더라도 박연차 수사를 통해 살아 있는 권력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친이 세력을 결집하는 동시에 친박 세력을 위축시키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인해 그야말로 정치 지형의 일대 변화를 앞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당의 한 축인 친노 진영이 거의 와해 직전 단계에 와 있다. 박회장이 여야 가리지 않고 로비를 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노 전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집중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3월26일 현재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 장인태 전 행정자치부 2차관, 이정욱 전 해양수산개발원장,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했던 이광재 의원이 뇌물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의전비서관 출신인 서갑원 의원도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다. 이의원은 당 정책위 부의장, 서 의원은 원내수석부대표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 민주당으로서도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노 전 대통령 정치 재개 움직임에 제동

하지만 이미 박연차 쓰나미는 이들의 해명을 왜소하게 만들 만큼 무서운 속도로 친노 세력을 휩쓸고 있다. 얼마 안 남은 친노계 현역 의원 중에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최철국 의원의 이름이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에서 몇 안 되는 PK 인사인 탓이다. 박회장과 친노 정치인들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도 계속 이름이 거론되면서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뿐이 아니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등 ‘부산 386’ 인사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말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와 후원자 정화삼씨, 최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까지 포함하면 친노 진영은 거의 초토화된 형국이나 다름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명박 정부에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하려던 친노 그룹이 이번 수사로 사실상 정치적으로 퇴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도덕성이 무너진 마당에 친노 혹은 참여정부 정신의 계승 같은 것을 내걸고 의미 있는 무엇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시사평론가 유창선)라는 것이다.

지난해 말 노건평씨 구속 이전만 해도 정치권에서는 친노 진영이 영남 신당 창당 등을 통해 정치적 재기를 노린다는 관측이 나왔었다. 대선 패배 이후 바싹 몸을 엎드렸던 친노 진영은 청와대 참모 출신이 주축이 된 ‘청정회’(가칭), 이해찬 전 총리 주도의 연구재단 ‘광장’ 등의 설립이 잇따랐다. 하지만 2~3개월의 시차를 두고 진행된 세종증권 인수 로비와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친노 진영은 정치적 재기를 위한 물적 토대는 물론이고 인적 자원까지 깡그리 잃어버릴 판이 되었다는 것이 정치권의 판단이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본격화한 지난 3월15일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 퇴임 1주년을 전후해 활발하게 글을 올리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뒤 박회장에게 차용증을 써주고 15억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데다, 박회장의 홍콩법인 돈 50억원을 미국 지인의 계좌를 통해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작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력 부인하고 있지만, 여권에서 박연차 수사의 종착점은 ‘노무현 게이트’라며 쐐기 박기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과 관련한 의혹이 범죄가 된다면 전직 대통령이라도 처벌을 받는 것이 법치주의 이념에 부합한다”(한나라당 안상수 의원), “박연차 수사의 마지막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되지 않겠느냐”(홍준표 원내대표) 등의 언급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 움직임을 사전에 틀어막기 위해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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