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영웅 본색’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9.04.0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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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에서 세계 수준의 기량 펼쳐…정신력·팀워크에서는 최고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최대 승자는 대한민국 대표팀이다. 우승팀은 아니었지만 가장 많은 화제를 일으키고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한국 대표팀이었다. 해외 언론은 연일 대한민국 야구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한국 야구가 이런 성적을 거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 6개, 미국에 8개가 있는 돔구장이 한국에는 없다. 고교 야구팀은 50여 개에 불과해 4천개가 넘는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메이저리거는 추신수 한 명 뿐이고, 일본에서 뛰고 있는 임창용을 포함해서 해외파가 2명에 불과하다. 한국의 야구 환경과 객관적인 지표를 감안하면 준우승이라는 성적은 놀랍기만 하다.

베이징올림픽 우승 경험이 자신감 심어줘

대표적인 데이터 스포츠인 야구에서 객관적인 지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린 한국 야구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다수 사람이 첫 손에 꼽는 것은 한국 선수들의 정신력이다. 애국심과 국가대표로서의 자긍심에 기반한 대표팀의 정신력은 WBC 참가팀 중 최고였다. 김인식 감독은 귀국 직후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우리 선수들은 가진 기량의 100% 이상을 발휘했다. 우리가 야구 강국의 선수들에 비해 모자란 점도 많지만 상대방을 물고 늘어지는 승부 근성과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할지 아는 것은 상대팀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대표팀은 대회 기간 내내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몸값 높은 메이저리그의 스타 선수들은 리그 경기를 생각해 몸을 사렸지만 한국 선수들은 몸을 날렸다. 결승전에서 이용규 선수가 도루하는 과정에서 나카지마의 무릎에 머리를 부딪혀 헬멧이 부러지는 와중에도 베이스에 얹은 손을 떼지 않은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애국심뿐만은 아니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얻은 자신감도 한몫했다. 세대 교체를 거친 젊은 선수들에게 베이징올림픽 우승이라는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프로 선수로서 자신의 이름값을 올리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일성 한국 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은 “선수들이 베이징올림픽 이후에 자신감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이 프로라는 의미를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는 경쟁의식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국 야구의 원동력을 설명했다.

대표팀 선수들의 단단한 팀워크도 큰 힘이었다. 대회 기간에 한국의 덕아웃처럼 이기고 있을 때나, 지고 있을 때나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준 곳은 없었다. 고교야구팀이 50여 개밖에 없다는 얕은 저변은 팀워크 면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 우리 선수들은 소속팀이 다르더라도 형·동생으로 지낸다. 중·고교 시절부터  국내 대회나 국제 대회에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최고의 리드를 보여준 박경완 선수가 윤석민·봉중근·류현진 선수 등의 능력을 최대치로 올릴 수 있었던 것도 대표팀 훈련 기간 이전에 이미 이들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팀을 거치지 않은 추신수 선수가 대표팀에 잘 융화될 수 있었던 것도 대표팀 주축인 이대호·김태균이라는 절친한 동기생들의 힘이 컸다.

얕은 선수층이 문제…야구의 저변 확대 절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야구의 힘을 정신력이나 팀워크에서만 찾는 것은 곤란하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한국 야구는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 특히 볼넷을 가장 적게 내준 투수진의 제구력과 유인구에 속지 않고 스트라이크를 골라 치는 타자들의 선구안은 대회 최고 수준이었다. 민훈기 KBS 해설위원은 “타자들이 상대 투수들의 구질을 파악하고 유인구에 속지 않는 선구안에서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수비력 면에서도 미국 본토에서 인정할 정도로 안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출중한 수비를 보여준 것은 반복 훈련을 철저히 하는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양성은 한국 야구의 또 다른 힘이다. 한국 야구는 일본과 함께 똑딱이 타선과 빠른 발, 잦은 작전 구사로 대변되는 스몰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실전에서 김인식호가 보여준 한국 야구는 스몰볼에 힘을 바탕으로 하는 빅볼이 결합된 토털 베이스볼이었다. 야구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 한데 뭉친 토털 베이스볼이 한국 야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투수진의 구성도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잠수함 투수들은 한국 투수진의 최고 비밀 병기였다. 마무리 임창용 선수와 중간 허리 역할을 맡은 정대현 선수는 ‘국민 노예’ 정현욱 선수와 함께 승리 계투조를 형성했다. 두 선수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구질을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과 중남미 선수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팀의 양상문 투수코치는 “잠수함 투수들이 잘해주었다. 아무래도 못 보던 볼이기 때문에 상대 선수들이 힘들어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잠수함 투수들을 발굴하는 일은 필요하다. 훌륭한 잠수함 투수가 포함되어야 대표팀 투수진의 구색이 맞춰진다”라고 말했다.

대표팀의 성과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선수 면면의 기량이 세계 수준에 있었다는 것이 바탕이 되었다. 김태균, 봉중근, 이범호, 김현수 등 대회 올스타로 뽑힌 4명 외에도 한국 선수들은 세계 수준에 걸맞은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했다. 김태균 선수는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에서 잘해내서 기분이 좋다. 한국의 각 구단 1, 2 선발들은 메이저나 일본 선수들에 비해 처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고 있는 손혁 투수인스트럭터도 “똑같은 계약으로 가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투수들은 미국이나 일본이나 갖다 놓아도 충분히 통할 것이다. 대신 오려면 정확한 계약을 하고 와야 마음 편하게 운동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야구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지만 얕은 선수층은 여전히 문제로 꼽힌다. 야구 저변의 확대가 절실한 이유이다. 민훈기 해설위원은 “갈수록 힘이 달린 것은 선수층이 얇았기 때문이다. 투수진이 골고루 좋았다면 허덕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저변 확대이다. 기본적인 것부터, 유소년 야구부터 시작해서 야구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 매번 입으로만 구장을 잘 짓고 인프라를 구축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도 그렇고, 이것이 계기다 말만 했는데 실제로 이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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