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앞에 몰렸던 그 긴 행렬 어디 갔나
  • 이현석 (재일 만화기획자) ()
  • 승인 2009.04.0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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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의 길 걷는 한·일 출판만화 시장의 어제와 오늘

▲ 대형 서점 만화 코너에 고급 장정의 단행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최근 국내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을 통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식객> <꽃보다 남자> <아이언 맨> <와치맨> 등의 공통분모는 모두 먼저 만화 지면을 통해 소개된 출판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만화 강국인 일본에서도 자국 만화가 원작인 <20세기 소년> <디트로이트 메탈시티> <도로로> 등의 실사 영화들이 큰 흥행 수익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일본 영화시장에서 자국 영화가 차지한 비중은 59.5%로서 이 중 상당수가 만화 원작 작품이었다.

성공 사례가 계속 이어지면서 영화사나 방송사들 사이에 만화 원작의 사용권을 따내기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 출간된 <맨홀>(츠츠이 테츠야·스퀘어 에닉스) 같은 호러스릴러 만화의 경우 한국의 영화사들과 일본 영화사들이 경쟁적으로 사용권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할리우드도 이런 사용권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아키라>(오오토모 카츠히로·고단샤), <공각기동대>(시로 마사무네·고단샤)와 같은 대작 일본 만화의 실사화 권리가 할리우드에 거액에 팔렸으며, 한국 만화로는 형민우씨가 그린 <프리스트>(대원)가 할리우드에서 실사 영화화된다.

저출산·인터넷 등으로 독자 숫자 크게 줄어

만화가 다른 장르의 창작 원천으로 떠오르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출판만화 시장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만화 왕국이라는 일본도 2000년대 후반기 들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전망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다.

 IMF 외환위기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와 정부의 청소년 보호법 시행 등으로 인해 시작된 한국 출판만화 시장의 불황은 최근 들어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1990년대 초반 1주일에 20만부까지 판매되던 한국의 만화잡지들은, 요즘 1만부가 채 팔리지 않는다. 작가들의 원고료도 약 10여 년 전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연재 만화를 책으로 펴내는 단행본 시장도 죽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행본 누적 부수 100만부 이상 파는 작가가 흔했지만, 지금은 2천~3천부를 겨우 팔고 초판 인쇄 부수 1만부를 넘기면 ‘대박’이라고 말해질 정도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에 1조 엔 규모이던 시장이 최근에는 5천억 엔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쇼가쿠칸의 <주간 영 선데이>, 코우단샤의 <월간 매거진 제트> <영 매거진 엎어즈>, 슈에이샤의 <월간 소년 점프> 등이 속속 폐간·휴간이 되는 경우가 줄을 잇고, 메이저 3사라고 불리던 거대 출판사에서도 정리해고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이런 출판만화 불황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저출산으로 인해 만화업계의 주력 소비자이던 어린이 인구가 감소 추세로 돌아서고, 독자 숫자가 줄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늘어나면서 만화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 매체라는 이점을 누리기 어려워졌다는 점. 과거, 일본에서는 ‘전철에서 모두 만화잡지를 읽고 있는’ 만화 대국이었지만 최근 들어 이런 풍경은 ‘모두 휴대전화를 들고 메일을 주고받는 사람이다’로 바뀌었다. 인터넷에 널려 있는 공짜 콘텐츠가 만화책의 가격조차도 비싸게 여겨지게 만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인터넷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보급되는 시점이 만화 불황기의 시작과 일치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로, 과거 만화는 활자 매체와는 달리 그림이라는 자극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활용한 매체여서 대중에게 각광을 받아왔지만, 화려한 색채와 움직임을 가진 영상 매체가 기술 발달로 인해 생활 주변에서 간단하게 소비되는 구조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그 지위가 축소되었다. 만화책은 아직 문자를 읽고 그려진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며 보아야 하는 적극적인 독서 쪽에 가깝지만,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는 그저 앉아서 듣고 보기만 하면 되는, 좀더 편리한 매체이다.

그렇다고 만화의 쇠퇴를 방치할 수만은 없다. 만화는 수많은 콘텐츠 사업의 원천을 제공해주는 밑거름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출판만화를 어떻게 활성화시켜야 할 것인가.

한국과 일본의 출판만화를 비교할 때, 양국이 모두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전혀 문제의 본질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시장의 축소는 잡지시장에 한정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기획자 부족한 한국, 새 독자 창출 더 힘들어

1995년 3천4백억 엔 규모였던 잡지시장은 2006년에 2천3백억 엔 규모로 줄어들었지만, 단행본 시장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이 연간 2천5백억 엔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성향에 맞는 작품을 보기 위해 잡지보다는 단행본을 직접 소비하는 경향으로 돌아선 것이다. 일본의 평론가 이토 고 씨는 2000년대부터 불거지는 일본 만화 불황설에 대해 “소년·소녀만화-소년·청년·성인만화라는 장르로 나뉘어 100만부씩 팔리던 거대 잡지 만화시장이, 오타쿠 잡지와 같이 마니악한 요구에 부응하는 중소 규모 잡지들의 시장으로 분할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즉, 이전에 유명 잡지 몇 개가 쓸어가던 이윤이 분산되면서, 불황이라는 소문이 크게 나돌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는 히트작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세인트 니상> <베가본드> <강철의 연금술사> 등 단행본 권당 100만부를 넘기는 작품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고, <뱀부 블레이드> <신암행어사> <디트로이트 메탈시티> 등 초판 20만~30만부를 발행하는 히트작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한국의 위기는 기획자(편집자)의 부재에서 찾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출판만화와 한국 출판만화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 것이 재능을 가진 작가 예비군을 시장성 있는 콘텐츠 제작자로 육성하고, 시장을 분석해 시의적절한 기획을 마련하는 편집·기획 체제였다. 보통 일본의 편집 체제는 만화잡지 하나당 적게는 6~7명(월간지)에서 많게는 50여 명(고단샤의 주간지 <주간 소년 메거진>의 경우)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보통 1명당 10여 명의 작가 예비군을 관리하면서 훈련시키고, 이들이 시장성을 갖췄다고 판단되면 잡지 지면에 등장시킨다. 한국은 잡지당 겨우 2~3명의 편집기자가 만화 잡지를 꾸려간다. 당연히, 육성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신인 작가의 숫자가 적을 수 밖에 없고, 양질의 콘텐츠가 만들어질 확률도 적어진다. 또한, 1990년대 들어오면서 만화의 작화나 스토리 구성 수준이 지극히 높아지면서, 작가 혼자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여기에는 스토리에 대한 기획·취재·진행을 전체적으로 관리해줄 통찰력 있는 인재가 필수적이다. 

최근에 한국 작가 작품으로는 사상 처음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화된 만화 <흑신>(박성우-임달영·스퀘어 에닉스)이나 누적 판매 부수 2백만부를 기록한 <신 암행어사>(양경일-윤인완·쇼가쿠칸)처럼 한국 작가가 일본에서 큰 성과를 올리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 작품들은 한국에서 역수입되어 출간되어도 여타 한국 만화보다 더 좋은 성과를 올린다. 즉, 작가 인력이나 창작의욕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재능을 가져다가 지금 시장에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가를 담당하는 편집자-기획자 인력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획과 관리에서 밀리면서 새로운 독자 창출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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