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 기업이면 불황 속에서도 달러가 ‘우르르’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4.0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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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SKT 등 해외 채권 발행 잇달아 성공 금리 높아 상환 닥치면 어려움 겪을 수도

ⓒ연합뉴스

▲ 원·달러(위)에 대한 환율이 오름세를 지속하던 2월 말 외환은행 환전 창구의 환율표가 1천6백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불황 속에서 국내 우량 기업들로 달러 자금이 몰리고 있다.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대량으로 팔리는가 하면 몇몇 기업들의 경우 해외 채권 발행에 성공해 자금줄이 탄탄해졌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월별 회사채 발행액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조원 안팎에서 12월 7조4천억원으로 크게 늘어났다. 지난 2월에는 8조2천억원으로 3개월 만에 4배 가까이 불어났다. 3월 역시 24일 기준으로 6조2천억원 규모의 회사채가 발행되었다.

매수 주체는 국내 기관이나 개인에서 외국인 투자자로 바뀌어가고 있다. 신동준 채권부 채권시장팀장은 “국채에 비하면 은행채나 회사채의 외국인 편입 비율은 아직 낮은 편이다. 그러나 최근 회사채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외국 자금이 꾸준히 채권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국 투자회사 프랭클린 템플턴은 최근 한국의 투자 등급 회사채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이 회사는 아시아 시장의 미래 가능성을 높이 보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원화가 강세 국면으로 돌아설 경우를 염두에 두고 투자 등급 회사채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이 회사의 로버트 월트너 채권 투자 부문 전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원화 가치가 바닥까지 간 것으로 보고 회사채를 매입 중이다. 산업은행과 포스코, 신한은행 등을 선호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국내 기업 회사채·해외 채권에 달러 유입 늘어

국내 우량 기업들은 해외 채권 발행을 통한 달러 조달에도 잇달아 성공을 거두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 3월20일 7억 달러 규모의 해외 채권 발행을 완료했다. 포스코는 그동안 원료 구매와 시설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외 채권 발행을 타진해왔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의 투자 기관이 몰려들면서 예상액인 7억 달러보다 4배 이상 많은 37억 달러의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조달 금리는 연 8.95%이다.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당초 예상했던 연 9.25~9.5%보다는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 회사측의 설명이다. 이상춘 홍보팀장은 “이사회에서 해외 채권 발행 한도를 10억 달러로 의결했기 때문에 3억 달러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금리가 너무 높아 7억 달러 선에서 마무리했다”라고 설명했다. SK텔레콤도 이날 3억3천만 달러 규모의 해외 교환사채(EB) 발행을 무사히 마쳤다. 5년 만기시 주식 교환 가격은 23만10원이다. 지난 3월20일 SK텔레콤 종가가 18만8천원인 점을 감안할 때 23% 정도의 교환 프리미엄이 붙은 셈이다.

백창돈 SK텔레콤 홍보팀 차장은 “해외 채권 발행 환경이 완전히 좋아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투자자들이 금리 등 투자 조건을 놓고 여전히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 선도 사업자라는 점과 안정적으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 투자자에게 신뢰를 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우량 기업들을 통해 달러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고 있다. 경쟁력 있는 기업들에게는 불황기가 새로운 전기가 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포스코의 경우 아시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해외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운전 자금 및 시설 투자 자금 확보를 위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자금 차입 시도가 잇따를 것 같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금융 위기 이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많았다. 포스코나 SK텔레콤의 채권 발행 성공을 계기로 기업들이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라고 전했다. 

포스코의 해외 채권 발행에 참여했던 로드리고 조릴라 씨티그룹 아시아 마켓 공동대표는 최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자금 시장에 커다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포스코의 성공을 계기로 자금 조달을 원하는 한국 기업에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금융권에서는 해외 채권 발행 계획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기업은행은 곧 5억 달러 이상의 외화 표시 채권을 발행할 예정이다. 최근 주간사 선정까지 마쳤다. 수출입은행도 5~6월을 목표로 30억 달러 규모의 해외 채권 발행을 추진 중이다. 하나은행은 정부 보증을 통해 외화 장기 채권을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석유공사나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한국가스공사, 코레일 등 공기업도 현재 100억 달러 규모의 해외 차입을 준비 중이다. 이에 맞추어 정부도 관련 규정을 대폭 손질할 예정이다. 정부는 우선 ‘공공 기관 등의 환위험 관리에 관한 표준 지침’을 개정해 외화 차입을 억제했던 규정을 상당 부분 완화할 계획이다. 또, 외화 차입으로 공기업의 재무 건전성이 나빠지더라도 경영 평가에 불이익이 없도록 공기업 평가 편람도 고치기로 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의 경우 보통 안정적인 공기업 채권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외화 거래를 할 때 환 헤지를 해야 하는 의무 조항 때문에 그동안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 공기업들에 달러 자금을 대량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글로벌 금융 위기로 유동성이 흔들리던 차에 우량 기업들에 국한된 현상이지만 달러 자금이 속속 유입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당장 해외 자금 조달로 원료 구입이나 시설 투자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외환시장 역시 달러 유입에 따른 변동성이 줄어들어 크게 안정될 수 있다. 환율이나 기업 환경의 개선은 증시에도 영향을 미쳐 투자심리 개선에 도움을 주게 된다.

관련 규제 완화되면 공기업도 나설 듯

문제는 채권 발행 금리이다. 이번에 7억 달러의 채권을 발행한 포스코측은 금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0.5% 정도 줄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 8%대 후반의 금리는 여전히 높은 편이다. SK텔레콤은 금리가 연 1.75%로 낮지만 교환 프리미엄이 23%에 달해 실제로는 상당한 금융 비용을 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포스코측은 “만기 시점인 5년 뒤에는 원화 가치가 상당 부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상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SK 텔레콤도 “교환 프리미엄이 높지만 만기 상환 때까지는 주가가 충분히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유정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요즘 같은 상황에서 해외 채권 발행에 성공한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앞으로 국제 금융시장이 진정되면 연 8.9%대의 금리는 높은 수준이 아니다. 포스코나 SK텔레콤에서도 이를 감안해서 채권 발행 조건을 제시했을 것으로 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상반기 외채 상환에 따른 달러 수요로 인해 원화가 지속적인 약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부담은 단기 해외 채권 발행 기업에 고스란히 전가될 수 있다. 국제 금융시장이 언제든 다시 요동칠 수 있는 것도 부담거리로 지적되고 있다.

박선욱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도 금융시장이 안정되었다가 갑자기 위기 상황에 놓임에 따라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나빠졌다. 특히 환율의 변동성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장기가 아닌 단기 채권은 기업들에게 유동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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