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문 앞에서 숨 고르기인가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4.0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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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FTA 협상 최종 단계에서 결렬…성사되면 세계 최대 경제권 문 열려

▲ 3월24일 한국과 EU 수석 대표가 한·EU FTA 8차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EU(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이 성사 단계까지 갔다가 결렬되었다. 한국과 유럽연합 통상 장관들은 지난 4월2일 영국 런던에서 타결을 시도했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져야 했다. 유럽연합 집행부는 지난 4월3일 ‘(유럽연합과 한국의) 통상 장관들은 협상 결과를 각자 정부에게 보고하고 협상 타결에 필요한 방안을 모색한다’라는 요지의 공식 발표문을 발표했다. 이번 통상 장관 회담에서 타결되지 않았으나 한·EU FTA가 무산되지는 않을 듯하다. 통상 장관이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협상 내용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돌파구가 마련될 소지가 남아 있다. 지금까지 합의하지 못한 쟁점도 관세 환급 제도밖에 없다. 관세 환급과 관련해 양자 사이에 의견 차이가 워낙 명확해 협상 타결을 막고 있다.

한·EU FTA가 무산될 때 양자가 받는 타격은 크다. 양자는 각자 다른 나라와 FTA를 잇달아 체결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칠레·싱가포르·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8개국,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4개국과 FTA를 체결했다. 한·미 FTA는 의회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또, 캐나다·인도·일본·맥시코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칠레·멕시코와 FTA를 맺었고 터키와 관세 동맹, 크로아티아와 제휴 협정을 체결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페르시아만협력회의(GCC)·인도·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FTA를 추진하고 있다. 양자가 FTA를 체결하지 않으면 양자는 각자 다른 나라들과 협정을 추진하면서 협상 타결 국가에게 특혜를 부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한국과 유럽연합 사이에 무역과 투자 관계가 크게 축소될 소지가 있다. IBM 벨기에 지사가 DMI·티콘·TAC와 함께 발표한 ‘한·EU FTA, 무역 지속가능성 영향 평가’라는 보고서는 ‘한·EU FTA이 무산되면 한국과 유럽연합 사이 상호 무역과 투자 관계는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지난해 유럽연합에 5백83억7천만 달러를 수출했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유럽연합은 한국에 4백억 달러를 수출했다. 교역 상대국 가운데 네 번째로 규모가 크다. 서비스교역 규모도 90억 달러나 된다. 양자 사이에 교역 규모는 해마다 11%가량 늘어나고 있다. 유럽연합은 한국에서 외국인 직접투자(FDI) 부문 1위 국가이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직접투자 가운데 45%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유럽연합은 2006년 10월4일 ‘세계에서 경쟁하는 글로벌 유럽’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적극적으로 양자 내지 다자 간 FTA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양국 경제 성장 기대 부풀어…국내 양돈 농가 피해 클 수도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왼쪽)과 캐서린 애스턴 EU 통상 집행위원. ⓒ연합뉴스

유럽연합은 한·EU FTA를 체결해 한국 시장을 동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양자가 가진 경제·정치적 필요가 명확하다 보니 한·EU FTA가 무산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연구실 상무는 “한·EU FTA가 양국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서로 잘 알고 있어 언제 타결되느냐가 문제이지 성사 자체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은 세계 최대 단일 경제권이다. 인구가 5억명에 이르고 국내총생산(GDP)은 15조 달러나 된다. 한·EU FTA가 체결되면 세계 최대 경제권이 한국에게 문을 연다. 관세·비관세 장벽이 사라지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소속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잇달아 들어온다. 화학·기계 분야에서 국내 중소기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겠지만 유럽 도로를 달리는 한국산 자동차는 늘어날 것이다. 국내 금융·법률·의료 서비스 시장은 개방되고 한국산 전기·전자 제품은 유럽 소비 시장을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유럽산 와인 값은 13%가량 떨어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의류와 화장품의 관세는 단계적으로 없어진다. 이만큼 한·EU FTA가 한국 사회·경제에 미칠 영향은 한·미 FTA에 비해 적지 않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EU FTA 타결이 임박했어도 한국 사회는 조용하다. 한·미 FTA는 협상 타결과 함께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와 달리 3월24일 한·EU FTA는 체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과 김연아 세계피겨선수권 우승 소식에 묻혔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EU FTA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의아하다”라고 말했다.

한·EU FTA는 소고기 시장 개방처럼 한국 사회에 민감한 이슈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한·미 FTA 타결로 인해 30개월령 미만 소고기 시장이 전면 개방되자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은 70%에서 20%대로 곤두박질쳤다. 한·EU FTA가 체결되면 국내 한우 농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지만 국내 양돈 농가는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 돼지고기 시장도 소고기 시장에 비해 작지 않다. 국내 농업 부문 총생산액 34조6천8백50억원 가운데 양돈이 차지하는 비중은 세 번째로 높다. 지난해 양돈 농가 생산액은 3조3천2백억원으로 2위인 한·육우 3조4천5백억원과 비교해 별 차이가 없다. 더욱이 유럽연합이 경쟁 우위를 가지고 있는 낙농 제품까지 포함하면 한·EU FTA가 국내 농가에 미치는 영향은 한·미 FTA보다 크다. 국내 낙농 제품 생산액은 1조5천5백억원이다. 지금처럼 한·EU FTA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협정에 미치는 영향을 한국 사회가 실감하지 못한 탓일까? 

고상두 연세대 EU센터 소장은 “협정이 타결되고 국회 비전 과정을 거치면서 실익을 따지게 되면 한·EU FTA가 주목을 받게 되고 이에 따른 논란도 커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초 예상처럼 올해 상반기 협상이 타결되어 국회 비준 과정을 거치면서 이익단체의 견해가 쏟아지면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없지 않다. 이제 양자는 다음 협상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제적 실익을 따지는 협상이 진행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협상이 준비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최고 통치자의 결단이 모색될 것이고 유럽연합은 27개 회원국 정상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 과제를 마치면 한·EU FTA에 대한 한국민의 심리적 비준 과정도 거쳐야 한다. 하지만 한·미 FTA만큼 혼선을 빚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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