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도 못 먹어” 약값에 두 번 운다
  • 석유선 (의료 전문 프리랜서) ()
  • 승인 2009.04.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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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 제약사 횡포에 발만 ‘동동’ “수입 약제에 면세 조치하고, 약가 협상에 가이드라인을”

▲ 삼성동 한국 로슈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에이즈(AIDS) 치료제인 ‘푸제온’ 공급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회적 편견으로 치료마저 당당하게 받을 수 없는 에이즈(HIV/AIDS) 환자들은 특허권을 빌미로 과다한 약값을 요구하는 일부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는 비단 에이즈 환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로 치부되는 희귀·난치성 질환 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국내 환자 수(유병 인구)가 2만명 이하이거나 적절한 치료법과 대체 의약품이 개발되지 않은 질환에 사용되는 의약품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해 환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고 있다.

문제는 희귀의약품의 경우 제품 공급의 결정권이 일반적인 시장 원리와 달리 소비자(환자)가 아닌 판매자(제약사)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정부와의 보험약가 협상에서 원하는 가격을 얻지 못하게 되면 제약사는 설사 시판 허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아예 약을 공급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임준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시장원리를 가동하면 상당 부분에서 사회적 권리와 부딪히게 되고, 특히 혁신적 신약일수록 독점적 권한(특허권)을 요구하면 환자의 생명권을 위협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말한다.

4년간 약값 줄다리기 이어온 ‘푸제온’

 이같은 사례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새로운 기전의 에이즈 치료제인 로슈 사의 ‘푸제온’이다. 푸제온의 개발은 기존 에이즈 치료제가 이미 감염된 세포 내의 HIV 바이러스 증식을 막는 약인 데 비해, 바이러스와 정상세포 간 융합을 억제(Fusion Inhibitors)하는 기전을 갖고 있어 약제 내성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에게는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도 푸제온을 ‘(HIV 감염인) 진료상 반드시 필요한 약제’라고 결정했고, 식약청은 2004년 5월 푸제온에 시판 허가를 내렸다. 이에 같은 해 6월 로슈 사는 푸제온을 ‘혁신적 신약’이라고 주장하며 4만3천2백35원의 보험가 적용을 신청했다. 그러나 약제급여위는 푸제온이 혁신적 신약이라고 보기에는 임상 자료가 부족하다며 절반에 해당하는 2만4천9백96원으로 낮추었고, 11월부터 보험 등재를 하도록 했다.

이에 로슈 사는 정부가 정한 약가에 불응해 공급을 거부하고 2005년 1월 혁신적 신약의 약가 기준에 해당하는 A7(미국, 일본,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조정 평균가를 주장하며 최소한 3만3천3백88원에 상한 금액 조정을 신청했지만 약제전문평가위는 이 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푸제온의 약가 협상은 지난 1월 공단과 로슈가 각각 2만5천7백46원, 3만원으로 제시한 가격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시판 허가 이후 4년이 넘도록 약가 인상을 요구하며 공급하지 않는 로슈 사에 환자들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로슈 사는 올해 2월부터 ‘동정적 프로그램(Expanded Access Program)’을 통해 일부 환자들에게 무상 공급을 하고 있다. 국내 시민단체에서는 동정적 프로그램이 한시적인 방편일 뿐이라며 국내에서 난치병 치료제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도록 특허의약품에 대한 ‘강제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 강제 실시란, 특허권자의 사익과 공공의 이익 간의 균형을 맞춰 특허 제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로 특허권자만 독점 생산할 수 있는 약을 제3자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이다.

그러나 푸제온 강제 실시에 대해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신형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정책실장은 “비정상적인 고가의 약을 요구하거나 공급을 거부하는 다국적 제약사의 행태는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전제가 있는 특허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오히려 강제 실시는 특허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허권의 기본 취지를 되살리는 방안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국적의약산업협회측은 “제약회사가 푸제온과 같은 필수·희귀 약제를 개발하는 데는 많은 시간·비용이 든다. 강제 실시는 단기적 재정 절감 효과, 환자의 약제 접근성 증대 등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업계의 신약 개발 의지를 떨어뜨리고 특허제 도입 취지에도 어긋난다”라고 반박했다.

“신약 개발에 많은 시간·비용 들어 어쩔 수 없어”

 이처럼 약이 필요한 환자와 제약 사간에 공방이 일고 있는 경우는 비단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3년 기적의 항암제로 불리던 ‘글리벡’의 가격 논란은 지금의 푸제온과 상당히 닮아 있다. 당시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들은 투병 중임에도 환자복을 입고 거리와 인권위를 점거하는 등 노바티스 사의 ‘글리벡’ 약값 인하와 보험 적용 확대를 주장했었다. 이는 노바티스가 2001년 4월에 글리벡 시판 허가 신청을 내면서 ‘동정적 프로그램’을 통해 일부 백혈병 환자에게 무상 공급한 뒤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게 글리벡 한 알당 2만5천원 내외(월 3백만~7백50만원)의 약값을 요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어 같은 해 11월19일 복지부가 1만7천8백62원(월 2백만~5백10만원)으로 보험약가를 고시하자 바로 며칠 뒤인 11월27일부터 노바티스는 글리벡 공급을 중단했다. 환자비상대책위원회가 항의해 12월10일부터 공급이 재개되었지만 독점력을 과시했고 결국, 노바티스는 이듬해 3월 2만4천55원으로 약가 재신청을 냈다.

 이에 환자들이 약값 인하, 보험 적용 확대, 강제 실시를 요구하며 1년 반이 넘도록 싸웠지만 무위로 끝났다. 결국, 복지부는 노바티스의 요구대로 A7의 가격을 기준으로 약값을 결정하는 대신 환자의 본인 부담금을 30%에서 20%로 인하하고 20% 중 10%를 노바티스가 부담키로 합의해 약은 지금 2만3천45원에 공급되고 있다. 지난해 6월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시민단체 등이 미국이나 타이완보다 글리벡 값이 비싸다며 약가 조정 신청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2006년 7월 폐암 항암제 ‘이레사’의 보험 약값이 효과에 견주어 턱없이 높다며 합리적 조정을 요구해 첫 성과를 낸 바 있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이레사의 보험 약값을 원래 6만2천10원에서 5만5천3원으로 낮추었다.

신현민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회장은 “특허에 대한 강제 실시권을 발동한다고 해서 환자들에게 약제 공급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희귀 질환자들에게 공급되는 수입 약제에 대해서는 면세 조치를 취하고 약가 협상시 가이드라인을 갖추고 협상해야 협상 결렬로 인한 환자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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