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로 채운 ‘비자금 인출기’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4.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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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회장이 홍콩에 세운 회사 APC의 정체 / 예치금 중 상당액이 로비에 쓰여

APC(Asia Pacific Company)는 박회장의 비자금 젖줄이었다. 지금까지 박회장이 연루된 사건에는 APC가 항상 연결 고리로 등장한다. 지난 2002년 10월 홍콩에 설립된 APC는 자본금 51만 달러 전액을 박회장이 투자했고, 태광아메리카의 대표이사인 조 아무개씨와 그의 딸이 대주주로 등재되어 있다.

박회장은 중국의 청도태광과 1994년 7월 호치민 시 인근 비엔호아 공단에 건설한 태광비나(운동화 제조업체)의 원자재 납품과 구매를 APC를 통해 중개 무역한 것처럼 꾸며 돈을 예치시켰다. 2003년 5월부터 2007년 7월까지 이런 방법으로 APC에 예치된 금액은 6천7백46만 달러로 당시 환율로 따지면 6백85억원에 이른다. 박회장은 조씨가 배당금을 받는 것처럼 속여 6백85억의 배당소득을 챙긴 뒤 국세청에 신고하지 않았다. 지난해 검찰은 종합소득세 2백42억7천여 만원을 탈루한 혐의로 박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APC는 일종의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이다. 조세 피난처로 유명한 케이먼 제도처럼 세금이 면제되거나 경감되는 나라 혹은 지역이 있는데 홍콩도 여기에 해당한다. 홍콩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원천소득에 대해서는 과세하지만 국외에서 일어나는 원천소득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본이득(capital gain)도 국외에서 일어나는 소득으로 간주해 과세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이나 베트남에 진출하는 기업의 경우 홍콩에 해외 법인을 두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세금 문제 때문에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지만 비자금을 조성할 목적으로 세우기도 한다. 특히 홍콩은 중계 무역의 거점이기 때문에 거래 중간에 실체 없는 회사를 하나 끼워넣으면 손쉽게 자금을 축적할 수 있다. APC와 같은 회사가 쉽게 설립되었다가 사라지는 이유이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보통 홍콩의 법인 설립은 2~3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대행업체를 이용할 경우 1주일이면 가능하다. 홍콩에 법인 설립과 청산을 대행해주는 업체가 1천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 기업의 경우도 홍콩의 유령 회사에 매출의 일부를 불입하게 해 조세를 회피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난해 7월 적발된 ‘오리온 전기’는 약 7년간 1백15억 엔(1천5백45억원)을 홍콩의 유령 법인으로 빼돌렸다가 적발되었다.

홍콩의 한 금융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서류상으로 볼 때 APC는 한국의 태광실업과 베트남 현지법인인 태광비나 등의 구매와 자금 거래 관련 업무를 담당할 목적으로 4∼5년 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2007년 12월께 법인 해산 절차를 밟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회사이다”라고 전했다. 이 말대로 홍콩에 등록된 법인을 검색할 수 있는 ‘홍콩기업등록국’에서는 현재 박회장이 설립한 APC를 찾을 수 없었다.

박회장은 6백85억원의 배당 수익을 여러 곳의 홍콩 현지에 있는 은행 계좌에 분산 예치했다. APC 계좌로 들어온 돈은 박회장의 로비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박회장이 공을 들인 주요 인사의 경우 상당수 해외에서 로비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검찰은 APC와의 관련성을 찾고 있다.

APC를 통해 2백50만 달러가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 친척 명의의 홍콩 계좌로 전달되었다. 정 전 회장은 이 중 1백80만 달러를 홍콩 침사추이의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이광재 의원도 베트남 등지에서 수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서갑원 의원이 박회장의 돈을 받은 것으로 검찰이 추정하고 있는 장소 역시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인식당이다. 이처럼 해외에서 이루어진 로비에 달러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APC 계좌에서 나온 돈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거꾸로 APC의 자금 중 일부가 태광비나로 들어갔고, 현지 로비에 사용된 흔적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위장 계열사 DNS 통해 국내로도 자금 유입”

APC의 자금 중 일부가 국내로 반입된 정황도 드러났다.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박회장측은 “2백억원 정도는 홍콩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베트남과 중국, 캄보디아 등 현지에서 로비 자금 및 사업 확장 비용으로 사용했다. 국내로는 들여오지 않았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APC의 자금이 태광의 위장 계열사로 알려진 ㈜DNS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국내판 APC’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DNS는 이미 한 차례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 2005년 5월 국방부의 규제 완화 방침에 따라 진해시 경화동과 이동, 석동 일대 비행안전 2구역 1천9백7만㎡에 위치한 건축물 등의 고도 제한이 35년 만에 대폭 완화되었다. 당시 태광실업 계열사인 정산개발이 구 동방유량의 공장 부지 13만㎡를 사들인 시기가 2005년 초였다. 시기상으로 박회장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겠냐는 의심을 받았다.

당시 정산개발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택지 개발 예정지로 지정된 덕분에 이전까지는 8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었던 부지였지만, 고도 제한 완화로 15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해진 땅을 바로 매각했다. 5백62억원에 매입한 부지를 DNS와 또 다른 건설사 등 두 곳에 넘겨 100억원대의 차익만을 남겼다.

DNS는 우림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해 1천2백가구의 아파트를 지어 분양했다. 검찰측 관계자는 “DNS의 사장이 지금 해외로 도피 중인 박회장의 측근인 점, 이해하기 어려운 토지 매각 과정 그리고 APC의 자금 흐름이 태광실업의 위장 계열사가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DNS 역시 APC처럼 2008년 1월 법인이 해산되었다.

APC는 홍콩에 지점을 두고 있는 국내 은행뿐만 아니라 HSBC, SC 등 외국계 은행에도 계좌를 만들어 거래했다. 결국, 홍콩에 본거지를 두었던 APC의 자금 흐름을 추적한다면 사건의 퍼즐을 맞출 수 있다고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박회장이 베트남과 미국 등지를 방문한 국내 유명 인사들에게 매번 수만 달러씩을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해외에서의 로비 자금은 대부분 APC 계좌에서 나왔다고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계좌 기록에 대한 전반적인 추적이 핵심이 될 전망이다.

일단 검찰은 홍콩 당국으로부터 APC 계좌 내역의 일부분을 건네받아 박회장을 상대로 돈의 최종 사용처를 추궁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계좌의 파악에도 나섰다. 홍만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은 3월30일 “박회장이 해외 비자금 6백85억원 외에도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좌가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APC 계좌 이외에도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 태광실업의 해외 법인과 관련된 계좌가 더 있어 추적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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