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북한 급변 사태’비밀 보고서 만들었다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4.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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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김정일 유고 가능성’ 보고받고 대응 매뉴얼 수립 지시

▲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에서 참석자들이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이 지난해 하반기께 청와대에 한 건의 보고서를 올렸다. ‘북한 급변 사태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였다. 워낙 극비 사안이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노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러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윤곽은 드러나고 있다. 핵심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5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 임기 내에 불어닥칠지도 모를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김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9월부터였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1월 초였다. 그나마도 사진을 통해서였다. 이른바 ‘사진 통치’라고 불리던 기간이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사진을 통해서 보아도 그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 확실하다는 쪽이었다.

여러 추측이 난무했지만, 2009년 들어서부터 김위원장의 건강이 서서히 회복세로 돌아섰다는 전망이 나왔다. 그 근거로 우선 김위원장의 외부 활동이 부쩍 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처음의 사진에서는 왼쪽 팔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했지만, 최근 공개된 동영상에서는 정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육안으로 볼 때 크게 티가 안 날 정도로 회복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현저히 살이 빠진 모습이 노출되었다. 이에 대해 남성욱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은 지난 4월1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위원장이 건강 악화로 몸무게가 줄었다기보다는 회복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체중을 줄이는 다이어트를 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회복 쪽에 무게를 두기도 했다.

정치적 오해 소지 있어 조심하면서도 각 부처에 ‘대비’ 주문

하지만 청와대나 국정원의 분위기는 다른 듯하다. 안보 분야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청와대는 현 정부 임기 내에 북한의 급변 사태가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는 “청와대가 최근 각 행정 부처와 관련 연구기관에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대응 매뉴얼을 준비하라고 강도 높게 지시한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는 통일·안보 관련 각 연구기관에서도 감지된다. 지난 3월 열린 ‘통일문제연구협의회’(약칭 통문협) 회의석상에서는 북한 급변 사태 등 체제 붕괴에 대비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 부쩍 강조되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날 논의를 주도한 이는 통문협 의장인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문협은 국책 연구기관과 민간 연구기관을 포함해, 39개 통일·안보 관련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협의체 모임이다. 여기에 참석한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통일부·국방부 등 정부 부처뿐만 아니라 연구기관에도 그런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책 연구기관은 압박이 좀더 크겠지만, 일부 민간 연구기관에서는 반대 의견이 개진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 4월9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개최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에 참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자들의 환호에 박수로 답례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책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급변 사태 대비책은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것을 나서서 하면 괜한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북한 로켓 발사 이후 한반도 긴장 정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일부 반대론의 목소리도 일리가 있다. 되도록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어렵다”라고 밝혔다.

정부 부처의 입장은 조심스럽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 급변 사태에 관한 대비책은 꾸준히 해오는 것이다. 최근 들어 갑자기 더 강화하고 하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관계자 역시 “우리는 위기관리 상황에서 유관 부처일 뿐이다. 비상계엄시 언론 통제 등은 기존의 충무 계획 등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따로 우리가 별도 매뉴얼을 준비할 필요는 없다”라고 밝혔다.

김정일 건강 이상 알린 국정원장의 예측 보고에 무게 실려

청와대에서 북한 급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근거는 무엇일까. 국정원의 보고서와 판단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지난해 봄과 여름, ‘촛불 정국’의 와중에서 끊임없이 경질설에 시달리던 김성호 전 국정원장이 만회를 위한 회심의 일타를 터뜨린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9월4일 청와대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안보 정책 조정회의였다. 회의를 소집한 주체는 국정원장이었다. 외교통상부장관, 통일부장관, 국방부장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외교안보 분야 수장들이 모두 참석했다. 여기서 김 전 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심각한 상태임을 알렸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분위기는 반신반의였다고 한다. “김원장이 오버하는 것 아니냐. 좀더 두고 보자”라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9월9일 이후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북한 정권 창립기념일인 이른바 9·9절 60주년 기념 행사장에 김위원장의 모습이 끝내 보이지 않은 것이다. 북한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9·9절, 그것도 60주년 행사장에 김위원장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탈북자 출신의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는 “9·9절 60주년 행사가 갖는 각별한 의미와 북한 주민들의 기대감으로 볼 때 김위원장이 단순한 이유로 행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밝혔다. 국정원의 예측 보고에 급격히 무게가 실렸다.

김 전 원장은 이튿날인 9월1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했다. 이날 김 전 원장의 발언은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는 것이 당시 참석자의 전언이다. 그는 “김위원장이 8월14일 이후 뇌졸중 또는 뇌일혈로 보이는 병이 발병했고, 외국 의료진에 의해 수술을 받은 뒤 현재는 회복 중이다. 밖으로 다닐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의식도 있고 언어에도 장애가 없다”라고 밝혔다. 이날 김 전 원장의 보고 내용을 듣고 의원들은 “어떻게 그렇게 옆에서 지켜보듯이 김정일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지 놀랍다”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국정원이 ‘특급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소스’에 대해서도 추측이 난무했다. 국정원이 미국으로부터 첩보를 전달받고 추적에 나섰다는 얘기도 있고, 청와대에서 직접 중국 고위 관계자로부터 정보를 전해 듣고 국정원에 조사를 지시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튼 국정원에서 김위원장의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있음을 감지하고 본격적인 추적에 나선 것은 지난해 8월 중순 무렵이었다.

통일·안보 부처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은 여러 첩보망을 통해 김위원장 것으로 추정되는 관련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안다. 이를 근거로 해서 국정원은 김정일의 신변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렸다. 그런데 그 관련 내용이 지난해 국내의 특정 언론사에서 조금씩 소개되기도 했다. 기밀이 유출된 데 대해 청와대와 국정원이 무척 당혹해했다고 들었다. 아무튼 당시 북한 급변 사태를 예고하는 그 보고서는 현 정부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준 것 같다”라고 전했다.

위 관계자가 언급한 언론 보도 중의 하나가 <월간조선> 보도이다. <월간조선>은 지난해 12월호에서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의료진들은 ‘김정일의 뇌와 심장, 건강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아 오래 살기가 어렵다’라고 보도했다. ‘5년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결론이었다. 그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올렸다”라고 밝혔다. 즉, 김위원장의 뇌 사진 판독 등으로 볼 때 5년 이내에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통치 행위가 불가능하리라고 본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매뉴얼은 부실…의도적인 북한 급변설 조장 의심도

▲ 3월17일 열린 ‘한민족통일준비위원회’ 발기인 대회. ⓒ연합뉴스

현재 이명박 정부가 갖는 위기감은 북한 급변 사태가 닥칠 경우 이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한나라당 미래위기대응특별위원회 위원장인 공성진 최고위원도 지난 4월9일 국방·외교·안보 분야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의 회의에서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마련할 것을 적극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정권 시절 국방 관련 핵심 업무를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현재 우리의 시스템상 북한 체제가 급격히 붕괴되거나 흔들려서 한반도에 급변 상태가 오면 그에 대한 대비책은 크게 네 가지로 마련되어 있다. 한·미연합사와 합참이 주도하는 ‘작전계획(작계) 5029’가 있고, 우리 군이 담당하는 구 ‘고당 계획’이 있다. 또, 통일부에서 준비하는 ‘충무 9000 계획’이 있고, 국정원에서 별도로 마련해놓은 ‘북한 급변 사태 대비 계획’ 등이 있다”라고 전했다.

작계 5029는 북한의 급변 사태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동 작전계획이다. 이에 비하면 구 고당 계획은 한국군만의 군사 계획으로 작계 5029의 하위 작전 개념이라는 것이다. 고당은 조만식 선생의 호를 딴 것인데, 현 정부 들어 이 계획의 명칭은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충무 9000은 북한 체제가 붕괴하면 북한에 자유화 행정본부를 설치해서 비상 통치하고, 그 본부장은 통일부장관이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국정원이 주도하는 대비 계획은 과거 안기부 시절부터 수립된 것으로 다소 우발적인 북한 사태에 대한 대응 매뉴얼 성격인 것으로 위 관계자는 설명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과거 김영삼 정권 시절에 조금 활발하게 논의되다가 그나마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는 중국도 이미 북한의 급변 사태에 대비하고 있고, 미국과 일본도 공동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미·중·일 3국이 공동 논의를 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만 과거의 매뉴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예비역 장성 출신의 한광문 (사)국가위기관리연구소 기획실장은 “우리의 위기 대응 매뉴얼이 너무 부실하다. 이 점을 강조하면 한쪽에서는 공안 정국을 조장한다고 몰아붙인다. 국방의 일차적 목표는 단 몇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최악의 위기 국면이 없도록 만반의 방어막을 형성하는 데 있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의도적으로 북한 급변설을 지나치게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중도 성향의 학자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내놓는다. 김동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객원교수와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장 등은 “설사 김위원장의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더라도 북한 체제가 김위원장 한 사람의 유고로 인해 갑자기 일시에 붕괴되거나 급격한 혼란이 올 것으로 예측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보다는 또 다른 권력 파워 엘리트를 살펴보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 대화 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원세훈 국정원장(오른쪽). ⓒ연합뉴스
“남북 대화의 창구를 틀 필요가 있고, 또 실제 그런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북한과의 물밑 접촉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핵심 자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지난 2월 기자와의 인터뷰 도중 언급한 내용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 2년차 들어 남북 대화 추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대북 문제에서 지난해와 달리 상당히 유연해졌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이대통령은 지난 4월3일 영국 런던에서 외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필요하다면 (북한에) 특사를 파견할 수도 있다”라고 언급했다. 지난해 7월 “대북 특사는 당분간 필요없다”라고 언급한 것과 비교하면 달라진 흐름이다. 북한에 대한 지나친 강경책으로 자칫 다자회담 틀 속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다는 비판과 지적이 잇따른 결과라는 분석도 낳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들어 다시 ‘이재오 대북 특사설’이 고개를 들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이 전 의원의 대북 특사설은 그가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지난해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마침 그가 미국에서 객원교수로 있던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관계대학원이 북한 문제에 상당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런 추측을 더 부채질했다. 이 전 의원도 틈나는 대로 북한에 대한 관심을 표했다. 가장 최근에는 귀국 직전인 지난 3월 초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북한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라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얼마 전 통일·안보 부처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원세훈 국정원장이 취임 직후인 지난 3월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원원장은 이대통령으로부터 두 가지 지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는 당시 미국에 있던 이재오 전 의원을 만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북한과의 막후 대화 창구를 알아보라고 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의 말이 정확하다면, 이 전 의원이 원원장과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가 상당히 주목된다.

이 전 의원은 평소 주변에 “나는 통일 얘기하다 10년씩이나 감옥까지 간 사람이다. 그런 것으로 치면 김위원장과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자신감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이 전 의원은 중앙대 재학 시절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선 운동권 출신이다. 그는 졸업 후에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내는 등 한때 친북 성향의 활동 전력으로 30년 동안 다섯 번 투옥된 경험이 있다. ‘김위원장과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일부 강경 우익 세력들 중에서는 이 전 의원의 대북 특사설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여권 내부에서도 찬반 양론이 팽팽히 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이재오 대북 특사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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