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 금지’ 좋아하다 부모 자식 간 남 될라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9.04.1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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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 건수 갈수록 늘어… 받아들여지면 가해자 집 나가야

▲ 불화로 인한 가정 폭력이 늘면서 접근 금지 신청도 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가족 사이에 접근 금지를 요청하는 임시 조치 신청이 늘어나고 있다. 임시 조치란 가정 폭력 등으로 피해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있을 때 법원이 가해자에게 격리 및 접근 금지를 한시적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2007년 8월 가정폭력방지법이 개정되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100m 접근 금지’ 등 임시 조치를 경찰에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해당 경찰이 이 요청을 무시할 경우 경찰은 그 사유를 담당 검사에게 보고해야 한다.

또, 접근 금지를 시킬 수 있는 기한을 종전 한 차례에서 두 차례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가장 엄한 처벌인 2개월 접근 금지의 경우 최대 6개월까지 기간이 늘어날 수 있다. 조건과 대상의 범위도 확대되었다. 생명과 신체에 대해 말로 협박을 받은 경우도 접근 금지를 신청할 수 있으며, 팩스·전화·메일 등의 협박 행위도 마찬가지로 대상에 포함된다.

그동안은 부부간 불화로 인한 가정 폭력이나 스토커적인 집착 등이 접근 금지 요청의 주된 사유였다. 가정 폭력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 데다 피해자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접근 금지 신청도 함께 늘어났다. 법원 통계에 따르면 가족 갈등에 따른 접근 금지 신청은 2007년 4백22건에서 2008년 4백61건으로 증가했다. 경찰에서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법원에 신청하지 않은 것까지 더한다면 신청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경찰 “상습적인 폭력 아니면 신청 요건 되지 않아”

최근에는 과거와 달리 자식이 부모를 상대로 접근 금지를 요청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 3월24일 졸업반 여대생 이 아무개씨(23)는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라’고 잔소리하면서 자신을 때렸다는 이유로 어머니에 대해 100m 이내 접근 금지 신청을 냈다. 서울 강동경찰서에 따르면, 어머니 김 아무개씨(53)가 “집에서 놀지만 말고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라”라고 나무라자, 이씨는 “공무원은 답답해서 싫다”라고 대들었다. 이에 화가 난 김씨가 고무줄로 딸의 손등을 때린 뒤 멱살을 잡았고, 딸은 인근 지구대로 달려가 ‘어머니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씨의 접근 금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찰이 법원에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동경찰서 관계자는 “폭력이 상습적이거나 연속적이지 않고 우발적인 경우에는 신청 요건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떠한 흉기를 사용했느냐 여부도 판단의 기준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의 경우 어머니가 딸을 나무라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며칠 뒤인 3월29일에는 아들을 때린 아버지에 대한 접근 금지 신청이 있었다.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실직한 가장인 아버지 임 아무개씨(50)는 술을 마시다가 아들(16)에게 치킨을 주문하라고 시킨 후 독촉 전화를 걸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아들의 뺨을 때렸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 김 아무개씨(51)가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고, 아들을 대신해 100m 이내 접근 금지 신청을 했다. 김씨는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왔다고 한다.

이 사건의 경우 경찰이 담당 검사를 통해 법원에 접근 금지를 곧바로 신청해 현재 결과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임씨의 폭력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상습적이라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아들은 경찰 조사에서 “아버지가 실직한 후 집에서 종종 혼자 술을 마셨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술에 취해 주먹을 휘둘렀다”라고 진술했다. 이날 일에 대해서도 “아버지 말은 듣기도 싫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임씨의 경우 예전에도 검사에게 불려 간 적이 있었다. 이후 폭력이 뜸해졌다고 하는데 이번에 다시 일을 저질렀다. 어린 아들이 법적 보호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어머니가 ‘남편이 아들을 때리지 못하게 해달라’며 대신 접근 금지 신청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제 부모를 대상으로 한 자녀들의 접근 금지 신청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서 관련 소식이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올해 초에는 전남 광주에서 ‘말썽을 자주 일으킨다’라고 나무라며 자신의 머리를 한 대 때린 어머니(47)를 상대로 아들(17)이 100m 이내 접근 금지 신청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림 최익견

17살 아들이 어머니가 때렸다고 ‘신청’하기도

문제는 부모의 폭력과 학대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접근 금지 신청이 활용되고 있지만, 사소한 다툼만으로 부모의 접근 금지를 신청하는 자녀들도 늘고 있다는 데 있다. 100m 접근 금지가 받아들여진다면 가해자는 집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가정 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법이 자칫 자식이 부모를 내쫓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다.

지광준 강남대 사회과학대학장은 “접근 금지 신청이 가정 폭력과 학대를 막는 제도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대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 밖으로 내쫓는 수단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지학장은 “더 큰 문제는 100m 이내 접근 금지 처분 이후이다. 가정에서 아버지로서의 자리와 권위가 모두 상실되어버린 채 접근 금지가 해제되어 돌아온 뒤 과연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라고 말했다.

물론 자녀가 원한다고 해서 부모에게 접근 금지 명령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경찰에서 일차적인 판단이 이루어진다. 경찰은 가정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조사를 마치고 피해자에게 접근 금지를 원하는지 묻는다. 이때 피해자가 신청을 하더라도 폭력 정도에 따라 검찰에 넘길지 여부는 달라진다. 어머니의 접근 금지 신청을 요구했던 여대생 이씨의 경우처럼 신청 자체가 검찰을 통해 법원으로 가지 못할 수 있다.
법원에서도 신청이 기각될 수 있다. 대부분 피해자의 생각이 바뀌어 임시 조치를 원하지 않는 경우이다. 접근 금지 신청이 올라오면 법원은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다시 한 번 묻는 과정을 거친다. 사안에 따라 기각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한다. 경찰이나 검찰 단계에서 걸러지기 때문이다. 서울가정법원 김정숙 판사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서로 간의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퇴거 및 접근 금지 등의 조치를 원한다고 했다가 시간이 흘러 법원에 신청이 된 상태에서 의사를 철회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라고 밝혔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접근 금지 신청이 늘어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부모로부터 폭력과 학대를 당하는 자녀를 당장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법원은 수십 년에 걸친 부모의 학대를 견딜 수 없다는 30대 여성 송 아무개씨의 신청을 받아들여 부모에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 송씨측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언어·신체 폭력에 시달렸고, 노동으로 번 소득까지 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하자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지인들을 동원해 감시를 했다는 것이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는 “가정의 경우 사전에 통제를 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법적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가정 문제의 특수성을 일정부분 인정해야 하겠지만 단지 가정 내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심각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접근 금지 신청도 그런 차원에서 봐야할 때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지광준 학장은 이와 관련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문제를 상담하는 중재 기구가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 오세훈 서울시장(오른쪽)도 접근 금지 신청을 낸 바 있다. ⓒ연합뉴스
그동안 접근 금지 신청은 유력 인사들의 전유물이었다. 외국의 유명 정치인과 연예인 등이 스토커나 파파라치의 ‘접근 불가’를 법원에 요청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대중에게 얼굴이 널리 알려진 이들에게 신변 보호의 필요성은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해 6월 공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철거민들을 상대로 낸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주목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공관 앞에서 시위를 한 자들의 행동은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집회, 시위 및 표현의 자유를 넘어섰다. 오시장의 평온한 사생활을 방해하고 명예를 훼손한 위법 행위이다. 시위자들이 앞으로도 계속 법원의 결정을 어기고 공관 앞에서 시위를 할 경우 위반 행위 1회당 오시장에게 50만원씩을 지급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앞서 2006년 6월에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과 노정혜 연구처장이 황우석 전 교수 지지자들을 상대로 낸 서울대 캠퍼스 출입 및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으로부터 받아들여져 화제가 되었다. 줄기세포 논란과 논문 조작 파문이 확산되면서 서울대가 황 전 교수를 파면하자 이에 항의하는 황 전 교수 지지자들이 정총장과 노처장을 비판하며 서울대에서 시위를 펼치던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황 전 교수 지지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에서 정총장과 노처장이 탔거나 타려는 차량으로부터 10m 이내에 접근하거나 차량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 욕설·위협·저주·야유하는 내용을 확성기로 방송하거나 유인물로 배포, 현수막·피켓 등에 써 게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정총장 등의 의사에 반해 반경 100m 이내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한 차례당 50만원씩을 정총장 등에 지급해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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