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깊이만 다시 확인한 반인종차별회의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4.2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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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대통령, 홀로코스트 부정하며 이스라엘 맹비난

▲ 4월20일 제2차 유엔 반인종차별회의에 참석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PA

이스라엘과 이란은 중동의 뇌관이다. 이스라엘은 핵을 개발하는 이란을 용납할 수 없고, 이란은 팔레스타인을 분열시키며 이슬람에 적대하는 이스라엘을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란은 심지어 유대인 6백만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도 부정한다. 이 만행에 이슬람이 개입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나치와 유사한 인종 차별을 자행하는 마당에 이스라엘을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서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홀로코스트의 부정은 이스라엘의 부정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두 나라 역사의 강에는 깊은 원한이 흐른다.

이 증오의 화산이 지난 4월20일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반인종차별회의(더반 회의)에서 다시 폭발했다. 이날 개회 연설을 맡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중동의 인종 차별 국가로 매도했다. 야유와 환호가 교차하는 가운데 등단한 그는 2차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이 팔레스타인 땅에 세운 이스라엘은 가장 잔혹하고 인종 차별적인 나라라고 말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고난을 해소한다는 말은 구실일 뿐이고,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중동 분쟁 자체가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 다수 이슬람 국가들의 인식이다.

회담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27개 유럽연합(EU) 대표 중 23명이 퇴장했다. 청중들은 퇴장하는 대표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듯 이스라엘과 미국 및 이들의 동맹들은 처음부터 회의 자체를 보이콧했다. 유엔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1차 회의에 이어 8년 만에 가까스로 마련한 모임은 초장부터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 회의의 당초 목적은 전세계의 인종 차별 정책을 규탄하고 관련 정부로 하여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란 대통령의 30분 연설이 끝난 후 퇴장했던 대표들이 2일째 회의에 다시 참석해 더반 회의의 성명을 다소 개선한 성명 초안에 합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성명에서는 이스라엘과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을 삭제했다. 이스라엘 규탄에 집중되었던 이전 회의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셈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아마디네자드의 발언 규탄에 가담했다. 유엔 인권담당 고등판무관 나비 필레이는 한 사람의 지각 없는 발언으로 일어난 소란에도 불구하고 8년 전 회의보다 진전된 합의가 마련된 것은 성과라고 평가했다. 

미국·이스라엘 불참한 회의장에서 EU 대표들도 대거 퇴장

이란 대통령의 연설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홀로코스트는 전설일 뿐이며 중동 문제 해결은 유대 국가의 파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대목에 치를 떨었다. 홀로코스트 기념일 전야인 4월20일 각의를 개최한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는 “우리 형제 6백만명이 학살되었으나 이 교훈을 모두가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슬프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2001년 더반 회의가 이스라엘을 타깃으로 삼자 회의에서 퇴장했다. 이번 회의에서도 더반 회의 선언문의 일부 대목이 포함될 것으로 알고 아예 참석을 거부했다. 캐나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호주도 불참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내 인권단체들은 보이콧 결정을 환영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오바마 행정부를 비난했다. 오바마는 회의가 개막되기 하루 전, 이런 기회를 소중히 생각하지만 과거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회의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입장, 즉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노선을 예단하는 회의 분위기가 문제가 된 셈이다.

인종 차별을 종식하기 위한 회의가 뒤틀린 배경은 너무 깊다. 나치의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아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은 또 다른 생존 위협에 직면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이슬람 민족은 3억명이다. 게다가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가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이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홀로코스트의 주역은 과거와 단절하고 행복을 누리고 있으나 그 피해자는 여전히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다. 7백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운명의 여신이 너무 가혹해 보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적대적 환경 속에서 생존 자체를 걱정하는 처지이다. 홀로코스트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조그만 나라임은 분명하다. 요르단 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이 나라는 미국의 메릴랜드 주 크기만 하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에서 기술했듯이 사방이 적에게 포위되어 있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생존을 보증하는 유일한 수단은 주변의 잠재적 적국들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이들은 잘 훈련되었고 첨단 무기로 무장했다. 게다가 핵무기도 보유했다. 그 덕분에 이집트 및 요르단과는 평화를 유지한다.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철통 같은 인보 보장을 받고 있는 점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4백만명이 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철책을 설치하고 요새를 만들고 도로를 봉쇄했다. 결국, 가자 지구는 고립무원의 육지 속 고도로 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위조치들이 팔레스타인에는 억압과 인종 차별로 인식되는 것이 문제이다.

인종 차별 해소 노력 부족한 현실 확인한 것이 회의의 ‘성과’

▲ 벤자민 네타냐후 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 추모일인 4월20일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헌화하고 있다. ⓒAP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회를 영위한다. 비밀 재판을 통해 미국 기자를 재판하는 이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역시 공존이 어려운 하나의 이유이다. 이스라엘이 이란과 전쟁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잠재되어 있다. 이란은 3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페르시아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자존심도 강하고 겨우 61년의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 정도는 깔보기도 한다. 이란이 핵을 보유하는 날 그리고 미국-이스라엘 동맹이 이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스라엘을 덮칠지 모른다는 악몽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보는 시각은 이와 다르다. 9·11 이후 이슬람을 테러 연루세력으로 보는 서방의 인식이 무엇보다 자존심을 건드린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책도 모순덩어리로 보인다. 겉으로는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말하면서, 팔레스타인이 속한 땅 23%에 정착촌을 만들고 남은 땅은 42년째 점령 중이다. 이스라엘은 먼저 유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국가 건설을 용인하라고 맞선다. 결국, 서로의 불신 속에서 평화는 표류한다.

역사적 원한의 종결은 홀로코스트의 극복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책임 인정을 통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위협의 증대를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 끝없는 두려움에 빠지거나 피해의식의 포로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상은 평화와 안정을 저해하는 온갖 폭력과 증오로 얼룩져 있다.

유엔 반인종차별회의는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이를 척결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확인한 점에서는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종 차별 해소를 주도할 미국이 이스라엘 때문에 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인종 문제의 전도가 얼마나 험난한가를 확인하는 계기만 마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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