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임금님’ 부시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5.05 22: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임 기간 잘못 따질 ‘진실위원회’ 설치 논란…‘전라’ 장난감도 출시

▲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못브을 형상화한 장난감 '조지 부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발가벗었다. 미국 전역에서는 요즘 ‘전라 부시’ 장난감 ‘조지 부시’가 시판되고 있다. 신체 주요 부분을 나뭇잎 대신 그의 고향인 텍사스 주의 디자인으로 가렸다. 바비 인형에 옷을 갈아 입히는 식의 장난감이다. 이 나신에 자석이 코팅된 스티커형 옷 몇 가지를 덧붙여 한 세트로 팔리고 있다. 장난감에는 ‘이제는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시 전 대통령을 비꼬아 예수와 가톨릭 교황 모양의 부시 얼굴이 같은 세트 속에 들어 있다. 한 세트의 가격은 12.95달러이다.

 지난 1월 퇴임한 직후부터 미국판 ‘진실위원회’ 설치 논란이 일면서 집권 8년간의 행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위기에 처한 부시에게는 장난감이 마냥 우스갯거리일 수만은 없다. 마치 숨겨진 부분이 몽땅 드러날 때의 난처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이 장난감은 묻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장난감 부시는 환하게 웃고 있다. 위기감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

 부시 전 대통령은 쿠바 섬 끄트머리의 미군기지 관타나모에서 자행된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포로에 대한 학대 및 고문 스캔들로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최근 정부 문건 가운데 전범 고문 메모가 공개되면서 부시 정부의 이면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연방상원의 패트릭 레히 의원(민주당·버몬트 주)은 지난 2월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 기간 동안 행한 잘못을 가리기 위한 진실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레히 의원은 부시 정부의 고문 관련 관리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의 퇴임 직후가 진실을 밝혀내기 가장 좋을 뿐만 아니라 해당 국법 위반자들에 대한 처벌 여부를 결정하는 데도 가장 용이한 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히 의원의 제안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필두로 러스 파인골드 상원의원 등 민주당 정치인들의 지지로 이어지고 있으며,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도 진실위원회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크리스토프는 “언론이 감시자(watchdog)가 아니라 애완견(lapdog)으로 전락한 시기에 저질러진 정부의 잘못은 진실위원회를 통해 가려져야 하고, 그래야만 미국의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법과 언론이 해내지 못한 일을 진실위원회가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의회는 최근 고문 메모를 작성한 법률 전문가들인 데이비드 애딩턴, 윌리엄 헤인즈, 한국계 존 유, 제이 바이비 그리고 스티븐 브래드버리 등을 상대로 청문회를 열어 메모 작성 경위를 들었다. 이들은 모두 하버드·예일·스탠퍼드·미시건·브리검영 등 명문 대학 출신의 법률 전문가 또는 변호사들이다.

 고문 메모는 부시 정부가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탈레반과 알카에다 관련 포로들을 심문하면서 정부와 학계 법률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데 대한 답변 또는 조언 형식의 보고서이다. 자문 내용은 군사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포로 고문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의 고문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를 물었다. 이 문건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고문 자체에 대한 도덕성이나 합법성을 확보하고 부시 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데 있다.

 딕 체니 전 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번 고문 메모 공개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전쟁 상태에서 전쟁 포로에 대한 심문과 효과적인 심문을 위한 고문은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고 불가피한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하자가 없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의 입장은 고문 메모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 관련자에 대한 재판도, 처벌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홀더 법무장관 역시 법 위에 사람이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오바마에 동조하고 있다. 워싱턴 정책 분석가들은 이 파장이 부시 전 대통령에게까지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관타나모 ‘고문 메모’가 전 대통령 재판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 부시에게 신발을 던졌던 이라크 기자의 행동을 재현하는 반미 시위 현장. ⓒAP연합

 그러나 워싱턴 싱크탱크의 법률 전문가들이나 미국 대통령 역사학자들은 이번 고문 메모 스캔들이 부시에게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부시 장난감이 활짝 웃고 있는 것이 그래서 부자연스럽지만은 않다.

미국 CATO 연구소의 법률 전문 연구원 데이비드 리트거스 박사는 “고문 메모가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리트거스는 고문 메모 내용이 정부 문건 비밀 해제와 함께 처음으로 실체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부시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조사를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트거스는 또, 고문 메모는 부시 전 대통령이 어느 수준에까지 개입했든 전체적으로 볼 때 실무선에서 결정되고 처리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을 법적으로 기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아메리칸 대학의 패트릭 그리핀 교수 역시 “법리 논쟁은 벌어지겠지만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한 처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데 동의했다. 미국 대통령학을 전공한 그리핀 교수는 미국 대통령 역사에서 “후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을 기소하는 데 앞장선 전례가 없다. 이번에도 그같은 미국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패트릭 교수는 특히 “미국 대통령 역사에서 신임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당장 부닥치는 것은 재임 기간에 해결하고 대처해야 할 미래에 대한 준비이므로 새 대통령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정쟁을 벌일 시간 여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연방 상원의 알렌 스펙터 의원(공화당·펜실베이니아 주)도 “새 정부가 전임 정부가 한 일을 두고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기 시작한다면 이런 시비는 대를 이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펙터 의원은 지난주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공화당을 탈당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옳겼을 정도로 민주당 성향이 강한 중진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민주당의 부시 때리기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은 민주당 내에서도 지금의 부시 때리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패트릭 교수는 미국 대통령 역사가 가지고 있는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대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사면 조치를 꼽았다. 닉슨은 지난 1974년 재선 직후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미국 정계와 법조계는 하야한 닉슨을 겨냥해 사법 처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직을 계승한 포드는 취임 직후 닉슨을 사면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것이 포드의 사면 취지였다.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까지 몰렸던 민주당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후임인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도 별 탈을 겪지 않았다. 당이 달라도 미국 역사에서 내려온 전통은 깨지지 않은 셈이다.

 대신 미국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전임 대통령을 다른 방식으로 욕보인다. 조지 W. 부시처럼 벌거벗은 대통령 장난감을 만들어 마음껏 조롱한다. 법 앞에서 피의자가 되는 것이 더 치욕일지 모르지만, 어린아이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 또한 얼마나 부끄러울지는 대통령을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