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 ‘경제 대통령’ 출현할까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5.05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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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법 개정 논의 활발…통과되면 한은 총재 위상·권한 한층 커져

ⓒ시사저널 유장훈

이성태 한국은행(한은) 총재가 ‘경제 대통령’에 준하는 권한을 갖게 될 듯하다. 세계 금융 위기 여파로 ‘은행의 은행’인 한은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한은 권한의 확대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한은이 미국 중앙 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준하는 권한을 확보하면, 이성태 한은 총재는 단지 통화 신용 정책을 주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벤 버냉키 FRB 의장처럼 경제 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한은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숙원 사업인 ‘시중 은행 단독 조사권’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중앙 은행으로서 위상을 재정립하겠다고 나섰다. 한은 조사국 금융산업팀 소속 조사역 10여 명은 지금 중앙 은행의 위상 정립과 관련한 논리를 개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성태 총재는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원리 원칙에 벗어나는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그가 조사국 직원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차현진 한은 금융산업팀장은 “(이총재가) 한은법 개정과 관련해 임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통화 신용 정책 기관으로 제한된 한은의 위상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회나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도 이참에 한은법을 개정해 중앙 은행에 걸맞은 권한을 부여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한은이 한은법 개정을 부추기거나 여론 작업을 조직적으로 펼쳤다기보다는 금융 위기가 한은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중앙 은행으로서 위상 재정립할 기회

한은은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초래한 신용 경색을 타개하고자 발권력을 동원해 17조원가량을 시중 금융 기관에 공급했다. 워낙 많은 돈이 풀리자 한은의 금융 정보 수집 체계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은이 풀린 돈이 어디에 있는지, 시중 은행의 유동성 실태는 어떤지, 금융시장 동향은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만큼 유동성 공급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한은은 시중 은행 조사권이 없어 금융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은은 제한된 공동 조사권만을 갖고 있다. 한은이 금감원에게 공동 조사를 요청하고 금감원이 이에 동의해야 금융 기관 조사가 가능하다. 한은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지만 양적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때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태 총재는 지난 4월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기재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심지어 금감원이 시중 은행으로부터 한국은행에게는 정보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박종근 국회 기재위 의원은 “시장에 엄청난 자금이 풀렸는데 자금 시장 현황을 파악해 국회에 보고할 기관이 없지 않느냐.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방치할 거냐”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국회 기재위 소속 의원들이었다.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이나 박영선 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기재위 소속 의원 10명이 ‘한국은행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개정안이 폭주하자 경제재정소위원회가 개별 의원 법안을 한데 합쳐 소위 안을 제안하기로 합의했다. 소위는 기재부, 금융위, 금감원, 한은으로부터 의견과 자료를 수집했다. 김종률 소위 위원장이 경제정의실천연합이 주최한 ‘한국은행법 개정 토론회’에 참석해 전문가의 견해를 청취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은의 대응이 평소 한은답지 않게 기민했다. 한은은 ‘한국은행법 개정의 당위성’이라는 보고서를 기재위 소속 의원들에게 뿌렸다. 한은은 이 보고서에서 ‘한은의 거시 건전성 감독 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하고 ‘은행을 직접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은이 기재위 소속 이혜훈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은행별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금감원에게 요구했으나 금감원이 불응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한은은 올해 2월 자본 확충 펀드에 10조원을 지원하기 직전까지도 시중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상반기 한은은 금감원에 유동성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국내 은행에 대한 부문 검사를 요청했으나 금감원이 불응했다고 한다. 한은은 또, 올해 2월 역시 부문 검사를 요청했으나 금감원은 정기 인사, 검사 인력 부족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담당 국장은 “부문 검사에 대해 담당 국장끼리 합의까지 마친 상태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날조에 가깝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진동수 금융위원장,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오른쪽부터)이 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왼쪽은 한국은행. ⓒ시사저널 이종현(왼쪽), 시사저널 유장훈(오른쪽)

2천5백여 금융 기관 자료 제출 요구권도 부여해

금융 위기 탓인지, 한은 조사국의 활약 덕인지 경제재정소위는 한은 편으로 돌아섰다. 소위는 한은법을 개정하면서 한은에게 전례 없이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다. 경제재정소위는 지난 4월29일 기재위 전체 회의에 제출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서 한은 설립 목적에 금융 안정 기능을 추가하고 한은에게 시중 은행 직접 조사권을 주었다. 비은행권을 포함해 2천5백여 개 금융 기관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권도 아울러 부여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한은은 지급결제 제도 운용과 관련한 규정 제정권과 실지조사권까지 행사하게 된다. 한국은행 출신 경제 관료 김 아무개씨(50)는 “경제재정소위가 제안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한국은행 총재는 ‘경제 대통령’이라 불러도 될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비은행권을 포함해 전체 금융 기관 2천5백여 개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지급결제 제도 운영·참가 기관에 대한 서면·실지조사권을 인정하는 것은 한은의 금융 정보 수집 체계를 개선하겠다는 법안 취지를 감안하면 너무 앞서 나갔다”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터무니없는 법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금감원 김 아무개 국장은 “1999년 은행감독원을 한국은행에서 분리해 통합 감독 기관을 설립한 취지가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정부 반발이 워낙 강한 탓인지 기재위는 한 발짝 물러섰다. 올해 정기국회 때까지 한은법 개정을 늦춘 것이다. 대신 기재부를 비롯해 관계 기관이 협의해 국회에 한은법 개정안을 제출하라고 강제했다. 기재위는 정부가 정기국회에 법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경제재정소위 안으로 통과시키겠다고 협박했다.

한은이 합의안 도출에 난색을 표하면 정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금감원의 한 국장은 “한은이 정기국회까지 합의안을 만드는 데 협조하지 않고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면 그때는 아주 추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은이 무조건 정부와의 협의를 회피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한은은 이제 어디까지 양보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한은은 이제 ‘재경부 남대문로 출장소’라는 오명을 벗고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관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시사저널 유장훈
김종률 민주당 의원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산하 경제재정소위 위원장을 맡아 한국은행법 개정을 주도하고 있다. 김의원은 지난 3개월 동안 한은법 개정과 관련해 관계 기관으로부터 의견도 듣고 자료도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기획재정부나 금융위, 금감원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한은법 개정과 관련한 경제재정소위 안을 이끌어내며 정부를 압박했다. 기획재정위(기재위)는 지난 4월29일 이번 임시국회 회기 마지막으로 한은법 개정안에 대해 논의했다. <시사저널>은 기재위 전체회의를 마치자마자 김종률 의원을 만나 한은법 개정과 관련해 남은 일정과 쟁점에 대해 들었다.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제재정소위 한은법 개정안에 대한 표결을 늦췄다. 앞으로 한은법 개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8월 정기국회까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협의해 한국은행법 개정과 관련한 정부 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윤증현 기재부장관이 약속했다. 정부 개정안이 나오면 경제재정소위가 마련한 개정안과 병합 심의할 것이다. 그때까지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지 않거나 관계 기관 합의안이 나오지 않으면 이번 경제재정소위가 마련한 한은법 개정안을 토대로 추가 심의해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기재위 소속 의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에 한은법 개정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다.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다수가 경제재정소위가 제안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의 표결을 늦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위에서 오랫동안 검토했고 관계 기관 수장 4명을 모두 불러놓고 전체 토론 과정을 거쳤음에도 다수 국회의원들이 기획재정부에게 한사코 기회를 더 주겠다는 뜻은 무엇인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관계 기관에 한 번 기회를 주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기획재정부는 예산안 편성권을 갖고 있다. 지역 민원 사업에 예산을 끌어내야 하는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기재부를 무조건 궁지로 몰기가 쉽지 않다. 이번 한은법 개정을 늦추자고 주장하는 기재위 소속 의원들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경제재정소위가 마련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 대해 기재부, 금융위, 금감원이 반발하고 있다. 경제재정소위 위원장으로서 정부의 반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은행은 최근 금융 위기가 초래한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17조원을 금융 기관에 공급했다. 한국은행은 지금 그 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은행 자금 사정은 어떤지, 금융시장 현황은 어떤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다. 금감원이 한국은행에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한은은 관련 정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업무 협조가 긴밀해야 할 양 기관이 이 모양이니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겠는가. 한은에 현장 조사권을 부여하는 것이 감독 업무의 중첩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식당의 위생검사와 소방검사를 각각 다른 기관이 실시하고 있지 않나. 한은은 금융시장 전반에 대한 거시 감독권을 갖고, 금감원은 개별 금융 기관에 대한 미시 감독원을 갖는 것이므로 감독권 중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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