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모를 ‘마구잡이 변종’의 공포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5.0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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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종 간 벽 허물며 변신 거듭…‘대변이’ 발생하면 기존 백신 무용지물

미국에서만 한 해 평균 100만명의 독감 환자가 발생하고 3만명이 사망한다. 그때마다 독감 백신을 만들어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인간이 바이러스를 극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변종 때문이다. 변종 바이러스는 천의 얼굴이라고 불릴 만큼 자주 변화하며 증식한다. 이종교 한국화학연구원 신물질연구단 박사는 “1970년대에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치료제가 있었다. 그러나 내성이 생긴 변종 바이러스들이 나타나 치료제가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했다”라며 변화무쌍한 변종의 특징을 설명했다.

흔히 독감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는 RNA라는 유전물질이 있다. 이 물질을 이용해 복제하면서 증식한다. 그런데 RNA의 유전자 구조는 DNA에 비해 불안정하기 때문에 복제하는 과정에서 ‘에러(err)’가 쉽게 발생한다. 다시 말해 ‘잘못’ 복제됨에 따라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생기는 것이다. 같은 A형 독감이라도 해마다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총 1백44종의 변종 출현할 수 있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는 헤마글루티니(H)와 뉴라미니데이즈(N)라는 단백질이 있다. 우리 몸에 들어오거나 빠져나갈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H에는 16종류(subtype), N에는 9종류가 있다. 이것들이 각각 조합을 이루면 계산상 H1N1부터 H16N9까지 많게는 1백44종의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다. 2003년 유행했던 조류 인플루엔자(AI)의 경우 H5N1이었으며, 이번에 발생한 인플루엔자A는 H1N1으로 분류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사람부터 고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포유류와 일부 조류를 숙주로 삼아 번식한다. 동물마다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있다는 뜻이다.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중에 일부는 종 간 벽(interspecies barrier)을 넘나든다. 사람과 개, 돼지와 새 사이에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오고 가는 것이다.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도 약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람 사이에 전염이 잘 되면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정도로 강하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종 간의 벽을 허물고 돌아다니는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이중·삼중으로 겹치기까지 한다. 이번 인플루엔자A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돼지·조류 인플루엔자가 복합되었다. 더욱 복잡한 관계로 탄생한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적자생존의 규칙에 따라 더욱 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나타날 수 있다.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만드는 매개체도 비단 조류나 돼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애완동물을 통한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에도 대비해야 한다. 박승철 인플루엔자A대책 자문위원장은 “쥐는 물론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과 사람 사이에서도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다. 인플루엔자A보다 더욱 전파력이 강하고 위험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런데 동물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혼합통(mixing vessel)일 수 있다. 게다가 사람은 지구 곳곳을 다니며 변종 인플루엔자를 퍼뜨리는 매개체이다”라며 앞으로 상상하지 못할 악성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등장을 예고했다.

과거에 한 번 나타났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다시 출현하면 안전할까? 전혀 안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같은 H1N1이라는 이름이 붙었더라도 동일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고 볼 수 없다. 이름은 같지만 사람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H1N1라는 이름을 가진 두 종류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전혀 다른 성질을 띨 수 있다. 강재순 인하대 미생물학교실 교수는 “1918년 전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인플루엔자와 이번에 발생한 인플루엔자A는 모두 H1N1이지만 변하는 차이가 다르므로 전혀 다른 성질이 나타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소변이라도 일정 조건 갖춰지면 대재앙 초래 가능”

변하는 차이를 항원 변이(antigenic shift)라고 하는데 차이가 작은 것을 ‘소변이’, 큰 것을 ‘대변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소변이 인플루엔자가 매년 발생하는 계절성 독감이다. 과거보다 조금 변했기 때문에 예방과 치료가 비교적 쉽다. 지난해 독감을 앓았던 사람은 면역이 생겨 소변이 인플루엔자를 막아낸다.

대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므로 기존 백신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면역력이 없기 때문에 치명적인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전염성까지 뛰어나면 세계적인 대유행병 즉, 팬데믹(pandemic)으로 이어진다.

이환종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1918년 스페인 독감부터 최근에 발생한 AI까지 대부분의 팬데믹은 대변이를 일으킨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변이=팬데믹’라는 공식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대변이 인플루엔자라도 전염성이나 독성이 약하면 팬데믹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소변이 인플루엔자라도 일정한 조건이 갖춰지면 대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다양한 환경에 따라 약하게 또는 강하게 변한다. 종 간 벽까지 허물면서 새로운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꾸준히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인간이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고 한다. 박승철 위원장은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계속 생기므로 피해자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은 대단하지 않다. 흐르는 물에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막아낼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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