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경부암, 예방의 길 열리나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5.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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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환자 다수에게서 자궁경부암 발암 바이러스 확인…백신으로 효과 볼 수도

편도선에 생기는 편도암 환자 10명 중 8명은 인유두종바이러스(HPV)에 감염된 사실이 국내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이는 국립암센터가 HPV와 편도암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정유석 국립암센터 특수암센터 박사는 “국립암센터를 찾은 편도암 환자 75명 가운데 80%에서 HPV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편도암을 포함한 두경부암의 주요 원인은 흡연이다. 이 환자들 중에는 흡연자도 있기 때문에 모두 HPV 때문에 암에 걸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결과는 HPV가 두경부암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만하다. 연구를 마치는 대로 세계 의학계에 보고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세계 의학계에 보고된 결과와도 일치해 HPV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지난 2월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도 <국제 암저널>에 편도암의 원인으로 HPV를 지목하며 98명의 편도암 환자 가운데 85%가 HPV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HPV는 자궁경부암 일으키는 바이러스

HPV는 자궁경부암 환자의 99%에서 발견되는 이른바 ‘발암 바이러스’이다. 이 바이러스가 자궁뿐만 아니라 폐, 위, 피부, 결막, 항문, 음경 등 다른 장기에서도 암을 일으킨다는 연구가 최근 2~3년 사이에 쏟아지면서 의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뇌와 눈을 제외한 머리 주변에 생긴 두경부암 세포에서 HPV가 흔히 발견되고 있다. 편도암, 구강암, 구인두암, 비강암, 갑상선암, 후두암 등이 대표적인 두경부암이다.

일각에서는 HPV를 두경부암의 원인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세계 의학계가 HPV를 두경부암의 요인으로 공식 인정할 경우 암 치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자궁경부암처럼 일부 두경부암도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1970년 이후 세계적으로 흡연율이 감소하면서 두경부암 발생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편도암, 설암, 인두암 등 일부 두경부암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후두암은 매년 3.5%씩 감소하지만 편도암은 매년 3%씩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간접 흡연이나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현재도 여러 가설이 나오고 있고, 이 가운데 HPV가 유력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전문가들은 생식기암과 두경부암 세포가 조직학적으로 유사하고 정상세포에서 발견되지 않는 HPV가 암세포에서는 빈번하게 발견되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지난 2005년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5천62건의 두경부암 세포 가운데 약 26%에서 HPV가 발견되었다”라고 발표했다. 또, 세계적으로 보고된 62개 관련 연구 결과를 종합한 메타 분석에서도 두경부암의 약 24%에서 HPV가 검출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흡연을 제외한 두경부암 발생의 주요인으로 HPV가 꼽히는 만큼 비흡연자도 두경부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HPV 감염으로 암에 걸린 사람 가운데 흡연자보다 비흡연자, 남성보다 여성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비흡연자와 여성이 두경부암에 걸리는 주된 이유가 HPV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HPV 감염 경로는 성관계, 출산, 일상적 접촉 등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구강 성교(오럴 섹스)에 의한 HPV 감염 가능성에 대해 집중 연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2005년 1만2천5백7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질 성교를 한 경험이 있는 남성은 97%, 여성은 98%로 나타났다. 동시에 구강 성교를 한 경험이 있는 남성이 90%, 여성은 88%로 집계되었고 항문 성교를 해본 남성은 40%, 여성은 35%로 조사되었다. 이들 가운데 구강 성교를 한 사람들에게서 HPV 감염자들이 많이 나왔다.

국립암센터의 정박사는 “에이즈 예방과 피임 목적으로 구강 성교가 늘어난 시기가 묘하게도 HPV 감염으로 인한 두경부암이 늘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구강 성교를 통해 HPV가 전염될 가능성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특히 어려서 최초 성관계를 가진 사람일수록 HPV에 감염될 확률이 높은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6명 이상의 파트너와 구강 성교를 할 경우 보통 성관계보다 구인두암에 걸릴 확률이 3.4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기를 통한 HPV 감염은 보고된 바 없지만 키스 등 육체적 접촉이나 감염된 물건을 같이 사용할 경우 전염될 가능성도 있다. 또, 자궁의 HPV가 복강을 통해 대장으로 전염된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에는 영·유아까지 HPV에 감염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HPV에 감염된 산모의 태아에서도 HPV가 발견되었고, 출산할 때 태아가 산도를 통해 나오는 과정에서 감염된 사례도 있다. HPV에 감염된 아이는 자라면서 다른 사람보다 두경부암에 빨리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홍식 강남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아이가 출산될 때 HPV에 감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산모의 경우 자연분만을 금지하고 제왕절개로 출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물론 HPV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모두 암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HPV에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다. 무엇보다 산모가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아직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이 두경부암에 효과를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산모의 HPV 감염을 최소화함으로써 영·유아의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접종 시기 정하기 어려워

두경부암 환자와 의료진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백신으로 암을 예방할 수 있는가이다. 자궁경부암을 백신으로 예방한다면 이론상으로 두경부암도 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의학적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속단할 수 없다. 또, 자궁과 두경부는 다른 장기여서 백신이 제대로 효과를 낼지도 의문이다. 두경부암에서 백신이 효과를 낸다고 해도 HPV 감염 경로와 시기가 불분명해 접종 시기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HPV가 암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부분적으로 밝혀져 있다. 우리 몸에는 P53과 pRb라는 암억제 인자가 있다. 이들은 세포가 어느 정도 커지면 성장을 멈추거나 자연적으로 사멸되게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런데 HPV에 있는 E6와 E7이라는 단백질이 P53과 pRb의 기능을 방해함으로써 암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HPV는 100여 종이 있으며 이 가운데 40종이 15종의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에서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종은 16형(type)과 18형이다. 편도암, 설암, 후두암, 인두암 등 대부분의 두경부암도 HPV 16형과 밀접하다.

지난해 말 미국 하버드 대학 퍼니스 교수가 <종양학 연보>에 HPV 6형이 두경부암 원인이라고 발표하면서 의학계가 한때 떠들썩한 적이 있다. HPV 16형과 18형에 비해 저위험군으로 분류된 6형과 11형이 두경부암의 일종인 후두 유두종의 발생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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