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삼성 배지 달까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5.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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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산업은행 민영화’ 관련 보고서 작성한 국책 연구기관 연구위원 인터뷰

▲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시사저널 유장훈

“산업은행이 민영화하면 인수할 수 있는 곳은 삼성그룹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 하는 국책 연구 기관 소속 연구위원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민영화한 산업은행은 삼성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연구위원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산업은행으로부터 연구 용역을 받아 지난 10년 동안 ‘산업은행 민영화’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왔다. 지금도 산업은행 민영화와 관련해 관계 부처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은행 업종을 제외한 주요 금융업종에서 시장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은행까지 인수하면 삼성그룹은 종합금융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제조업과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한 금융업을 양수겸장하면서 삼성그룹은 한국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산업은행은 투자금융·기업금융·국제금융 영역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자산 규모만 1백72조원이다. 외환위기 당시 출자 전환한 부실 기업들이 하나씩 살아나면서 대우조선해양이나 GM대우차를 비롯해 굵직한 제조업체 지분을 각각 30% 가까이 보유하고 있다(56쪽 표 참조). 대우증권·산은캐피탈·산은자산운용을 비롯해 투자금융 관련 자회사만 14개를 소유하고 있다. 지분 30% 미만을 소유한 비연결대상 자회사만 70개 업체에 육박한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산업은행 인수 업체는 단숨에 한국 금융업계 1위에 올라설 것이다”라고 말했다.

▲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는 민유성 한국산업은행 총재. ⓒ시사저널 임영무

산업은행 민영화 조치는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다. 한국의 산업 구조가 고도화하면서 산업은행의 고유 영역인 정책금융에 대한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정책금융이라는 공적 영역과 투자금융이라는 사적 영역이 섞이다 보니 산업은행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운용 자산이 충분한 것도 아니다. 산업은행은 100% 정부 소유이다. 정부는 공기업 주식을 현물 출자하는 방식으로 산업은행 자본금 8조7천억원을 납입했다. 정책 연구 기관 소속의 한 연구위원은 “정부가 공기업 주식을 현물출자해 (산업은행의) 자본금을 채우다 보니 산업은행이 운영할 자금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이처럼 유동 자산이 적은 탓에 투자 기회를 놓치기 일쑤이다. 더욱이 예산안을 비롯해 주요 경영 방침을 정부로부터 일일이 감독받는 처지이다. 산업은행이 급변하는 금융 환경에 제때 대처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산업은행을 정책금융만을 담당하는 정책금융공사와 산업 전문 투자금융 기관인 금융지주회사로 분리하고 산은지주회사는 민간에 팔자는 방안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급물살을 탔다. 이대통령은 선거 공약인 ‘산업은행 민영화’를 취임과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민유성 전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가 지난해 8월 산업은행 민영화라는 중책을 맡고 산업은행장에 취임했다. 산업은행은 올해 경영 방향에 ‘민영화 준비’를 내세울 만큼 민영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회도 지난 4월30일 산업은행 민영화 법안을 의결했다. 법안 시행과 함께 5년 안에 산업은행을 정책금융공사와 산은지주회사로 분리하고 산은지주회사의 지분 49%를 민간에 매각한다는 것이 법안의 요지이다. 49%를 인수한 업체에게는 추가로 2%를 매입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줌으로써 경영권마저 완전히 넘기게 된다.

국책 연구 기관 소속의 한 연구위원은 “정부는 내부적으로 ‘산업은행은 외국계 자본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내 금융 기관을 외국 자본에 파는 과정에서 국부 유출이 심했다는 반성이 반영되었다. 이 연구위원은 “(정부가) 밥 잘해서 외국 자본에 주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시중 은행에 넘기지는 않을 듯하다. 산업은행을 인수할 자금 여력을 갖춘 곳이 없다. 산업은행보다 자산 규모가 큰 시중 은행은 국민은행밖에 없다. 그나마 총자산 2백33조원 가운데 수신액이 대부분이라 산업은행 인수에 동원할 자금이 충분하지 않다. 국내외 투자자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 자금을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국민은행에게 기회가 돌아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국민은행은 외국인 지분이 85%나 된다. 따라서 외국계 자본에 팔지 않는다는 방침과 상충될 소지가 있다.

민영화 법에 따라 2013년 말까지 49% 지분 매각

산업은행은 오히려 시중 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지난 5월7일 사내에서 열린 ‘민영화 보고대회’에 참석해 “기존 금융 기관과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수신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전략적 인수·합병도 고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민간 자본을 예금 형태로 유치하는 수신 기능이 없다. 지점망을 갖춘 시중 은행을 인수해야 나중에 산업은행을 팔 때도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또, 산업은행은 CIB(종합투자금융)라는 비전에 걸맞은 사업 구조를 갖출 수 있게 된다. CIB는 최근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를 합병한 미국 상업은행 JP모건처럼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인수 대상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은행은 외환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이다. 외환은행은 지점 3백개, 한국씨티은행은 지점 2백개를 거느리고 있어 산업은행이 수신 기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더욱이 양 은행 최대 주주가 지분 매각을 희망하거나 유동성 위기에 빠져 매각에 응할 소지가 크다. 

외국계와 시중 은행을 제외하면 인수 주체로 재벌밖에 남지 않는다. 재벌이 산업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금융 산업과 산업자본을 엄격히 구분한다는 ‘금산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였다. 정부·여당은 지난 4월30일 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산업자본의 시중 은행 지분에 대한 소유 한도를 4%에서 9%로 상향 조정했고, 사모 출자 펀드(PEF) 지분에 대한 산업자본의 소유 한도를 18%(당초 10%)로 올렸다. 김종률 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은 “은행법 개정안 통과로 ‘금산 분리 원칙’이 무너졌다. 재벌은 이제 시중 은행 지분 9%를 소유할 수 있고, 복수의 사모 출자 펀드를 통해 은행 지분을 얼마든지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산업은행 총자산은 1백72조원이나 된다. 정책금융공사에게 한국전력 지분을 비롯해 주요 공기업 주식을 떼어준다고 하더라도 산은지주회사 보유 자산은 1백20조원이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산은지주회사 지분 49%의 매각 금액은 70조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산업은행 3단계 민영화 일정’(도표 참조)에 정책금융공사 정책금융 규모가 7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정도 금액을 동원할 수 있는 재벌은 기껏해야 2~3개에 불과하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자동차 관련 캐피탈업체밖에 없으므로 금융 업종에 진출한다고 추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SK그룹도 증권사 외에 이렇다 할 금융 자회사가 없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전자업종 계열사가 수십조 원이 넘는 유동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 여력도 충분하다. 은행업을 제외한 비은행 금융업종 계열사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사업 연관성과 시너지 효과를 감안하면 삼성그룹밖에 대안이 없는 셈이다. 정부 산하 연구 기관에서 금융정책을 연구하는 한 연구위원은 “산업은행 민영화 논의가 이만큼 진척된 이면에는 삼성그룹의 ‘푸시’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업은행 민영화 방안을 둘러싼 최대 쟁점은 산업은행 자산의 분배이다. 산업은행 보유 자산 가운데 산은지주회사에 남겨둘 것과 정책금융공사에게 떼어줄 것을 선별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기본 원칙만 세워져 있다. 정책금융공사는 정책금융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산은지주회사는 국내 최대 투자은행에 걸맞은 자산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조만간 마무리될 예정이다. 정부와 산업은행은 올해 9월 산은지주회사를 분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벌써 그 다음 주제인 시중 은행 인수까지 논의가 진척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 민영화 법안에 따르면 2013년 말까지 49% 지분 매각이 이루어진다. 올해 말이나 내년 초부터 산은지주회사 주인 찾기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전에 정부는 까다로운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삼성그룹이 산은지주회사를 인수하게 된다면, 특혜 시비가 제기될 소지가 충분한 탓이다. 인수할 여력이 있는 업체가 삼성밖에 없다는 현실론만으로 ‘특혜 시비’를 잠재우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은행까지 거느린 온전한 금융업을 꿈꾸던 삼성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지 여부는 삼성그룹이 여론의 역풍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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