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바지 대통령’ 할까
  • 조명진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 ()
  • 승인 2009.05.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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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드베데프 대통령 취임 1주년 맞은 러시아의 권력 구조, 푸틴 총리에 여전히 ‘무게’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왼쪽)가 한 행사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ITAR-TASS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5월7일 취임 1주년을 맞았다. 그는 제1부총리 시절이던 2007년 12월 정치적 스승인 블라디미르 푸틴 현 총리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지난해 3월2일 대통령 선거에서 7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대다수 언론은, 메드베데프가 푸틴 총리와 권력을 실질적으로 양분하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통해 강한 러시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비디오 블로그를 연 데 이어 지난 4월에는 세계 최대 블로그 사이트인 미국의 ‘라이브저널’ 러시아판에 자신의 블로그를 등록했다. 최근에는 반(反)크렘린 성향의 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인권 운동가들과 면담을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마치 여론을 수렴하는 정치를 펴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자유 언론에 대한 마피아식 보복이 자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언론 탄압의 예가 바로 러시아 주간지인 나바야 가제타 안나 폴리코브스카야를 포함한 3명의 기자들이 독살 또는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들 언론인의 공통점은 크렘린이 부정 부패와 인권 침해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공개했다가 목숨과 바꾸는 대가를 치렀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 정부는 최근 정부의 정기 모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러시아 전문가들과 유럽의 러시아 담당자들은 러시아의 권력 구조가 푸틴에서 메드베데프로 옮겨졌다고 관측하고 있다. 또한, 총리를 맡고 있는 전임 대통령 푸틴과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의 통치 형태를 ‘양두정치’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 러시아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푸틴은 차기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던 지난해 2월8일 국가평의회를 소집하고 2020년까지의 러시아 장기 발전 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2020 푸틴 계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러시아는 세계 제5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며, 그때 가면 러시아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 달러가 될 것이라는 구상이다. 이때 푸틴의 연설은 고별사라기보다는 새로 집권한 지도자가 제시하는, 2020년까지 향후 10여 년에 걸친 장기 발전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이날 연설에서 푸틴은 이임을 앞둔 지도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드베데프는 지난해 11월5일 대통령 취임 후 행한 첫 연차교서 연설에서 대내외 현안과 관련한 종전의 입장을 정리했다. 그는 연방의회 대의원들을 상대로 정의와 자유, 민주주의, 시민사회 등에 대해 강연했으며,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자유와 정의를 보장하고 러시아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헌법의 수호를 장황하게 역설한 뒤 느닷없이 대통령의 임기를 현재의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제의하고 나섰다.

대통령 임기 연장을 집권 1년 안에 내놓은 배경은 자신의 재임을 위함이 아닌, 푸틴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푸틴이 서두른 이유는 메드베데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재집권을 공식화한 것이다. 

세종연구소 정한구 박사는 ‘푸틴-메드베데프 체제의 출범과 러시아 정치의 장래’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러시아의 경우를 굳이 양두마차로 비유하는 것 자체가 과장되고 부적절하게 비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우에 문제는 푸틴이 여느 총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2008년 초까지도 대통령으로 봉직한 전직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퇴임 후에도 러시아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는 거대 여당인 통일 로시야당을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충성하는 실로비키 세력(러시아의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과거 KGB 등 정보 기관 출신들을 일컫는 말이다. 푸틴도 KGB 출신이다)이 아직도 정·관계의 중요한 자리에 포진하고 있고,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계속해서 높게 나타나고 있다.’

요직에 ‘푸틴의 사람들’ 포진…2012년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 관측도

누가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현재 푸틴의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메드베데프에게는 푸틴의 과거 KGB 사람들에 맞설 자신의 사람들이 없다. 크렘린 내 푸틴의 사람들로는 대통령 비서실의 수석 비서관인 블라디스랄프 수르코프, 알렉세이 크로모프, FSB(구KGB)의 수장으로 국가안보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는 니콜라이 파트루세프 등이 있다.

푸틴의 총리실을 보아도 누가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현 부총리는 세르게이 이바노프로 전 국방장관이고, 실로비키의 실질적인 수장격으로 이고르 세친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전 총리와 금융감독위원장을 역임한 빅토르 주브코프가 있다. 푸틴은 주브코프를 자신의 멘토로 여기는 인물이다. 푸틴은 주브코프의 사위를 국방장관에 임명한 적이 있다. 모든 재정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주브코프는 러시아 정부 내에 있는 누구라도 그 보직에서 끝내버릴 수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는 대통령도 포함된다.

러시아 전문가 디미트리 시도로프에 따르면, 메드베데프가 실질적인 러시아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푸틴이 그렇게 하도록 보장해주어야 한다. 둘째, 푸틴 진영에 필적할 수 있으며 메드베데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주지사들과 국방 및 안보 분야의 거물급들이 있어야 한다. 셋째, 메드베데프는 올리가르히(러시아 재벌)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 3가지 조건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충족시킬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러시아 재벌 가운데 메드베데프를 선호하는 부류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모스크바의 대다수 재력가들은 푸틴이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해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친(親)크렘린 사업가들은 메드베데프가 푸틴처럼 중재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최대의 약점으로 보고 있다.

푸틴 집권기에 형성된 러시아 정치 체제의 특징은 ‘신권위주의적 안정화(neo-authoritarian stabilization)’이다. 이 체제는 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민주주의 질서가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푸틴-메드베데프 체제 하에서 러시아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은 작다. 또, 러시아 정치에서 과거 전제정치 역사의 연속성 내지는 경로 의존성이 유난히 크다는 점에서 현 권위주의 체제가 변화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앞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다면 이 역시 러시아 민주화에 장애가 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푸틴이 주도하는 현재 집권 세력 아래에서는 경제가 호황이어도 러시아 민주화는 요원한 일이다.

현재 푸틴은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충분히 행사하고 있지만, 그의 권력욕에는 비단 푸틴 한 사람만의 이해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2012년에 푸틴을 대통령 자리에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실로비키의 계획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체첸공화국과 그루지야를 공격하며 무력 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천연가스를 외교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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