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전임자 임금’에 묶인 노사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5.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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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사용자 단체, 적용 유예 시한 앞두고 정면 대결…주요 국가에서는 지급 사례 없어

▲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5월16일 정부대전청사 남문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중리네거리로 이동, 대한통운 대전지사까지 행진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리는 동쪽에서 요란하나 실제 싸움은 서쪽에서 일어나고 있다.’ 국내 노사 문제 석학은 이제 비등점으로 치닫고 있는 ‘하투’의 양상을 ‘성동격서(聲東擊西)’에 비유했다. 화물연대가 지난 5월 둘째 주 ‘죽봉’을 동원한 폭력 시위를 벌이면서 하투의 문을 열었다. 노동자단체는 화물차주,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처럼 계약으로 고용되는 자영업자에게 노동 3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노사 관계 개선 및 고용 유연성 제고 방안’을 내세우며 이들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은 6월 총파업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특수고용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을 둘러싼 입법 투쟁이 하투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용자단체나 노동자단체가 쟁취하고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 관련 사안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은 ‘노조 전임자는 사용자로부터 어떠한 급여도 지급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 조항은 올해 말까지 적용을 유예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노조 전임자 급여는 노동조합이 지급해야’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작·배포하면서 ‘2010년 조건 없이 기존 법대로 전면 시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 조항은 지난 1997년 제정되었으나 3차례에 걸쳐 13년 동안 유예되었다. 노사 관계 선진화와 합리화를 꾀한다는 당초 입법 취지와 달리 노조 재정을 악화시켜 노조 활동을 위축시킬 소지가 있었던 탓이다. 이와 관련해 노사정위원회는 2010년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에 따른 후속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근로자·사용자·공익 위원으로 구성된 노사관계선진화위원회를 설립했다. 노동부도 더 이상 이 규정의 실행을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이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은 임금 보전이라는 단순 사안에 그치지 않고 산별 노조나 노총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쳐 향후 노사 관계를 좌우할 변수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 대기업 노조가 걷는 조합비 가운데 상당액이 산별 노조나 노총으로 건네지고 있다. 사용자가 노조 전임자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노조는 조합비로 전임자 임금을 보전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상위 노동단체에게 건넬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해마다 조합비 명목으로 걷는 금액은 100억원 안팎이다. 현대차 노조원은 4만5천명가량. 현대차 노조는 급여 1%를 조합비로 걷어 상급 단체인 금속노련이나 민노총에 건넨다. 상급 단체는 이렇게 걷힌 조합비의 54%를 금속노련 현대차 지부로 다시 보낸다. 지금 현대자동차의 노조 전임자는 90명이다. 현대차 평균 1인당 연봉이 6천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노조 전임자 90명의 한 해 급여액은 54억원이나 된다. 이 와중에 사용자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중단하면 노조는 조합비로 전임자의 임금을 충당해야 한다. ‘실탄’이 부족해지면 금속노련이나 민노총의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규정’ 실행되면 노조 활동 위축…노동자단체는 명분 없어 고민

▲ 정부가 도심에서의 대규모 집회를 원칙적으로 불허하기로 한 5월20일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 앞에서 민주노총 조합원 1천여 명이 정리해고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수원역까지 거리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다 보니 노동자단체는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처우 개선’을 투쟁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의 실행을 늦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동자단체의 고민은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데에 있다. 캐나다나 미국을 비롯해 주요 국가에서 기업이 전임자 급여를 지급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이인재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캐나다 노조는 독립성과 자주성이 높아 기업이 전임자 급여를 지급하는 사례가 거의 없고, 미국에서는 사용자가 노조나 근로자 대표에게 금전을 지원하면 형사법 위반으로 처벌된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미국 기업은 유급 노조 전임자를 두지 않는다. 자동차·기계·철강 업종 노조는 유급 전임자를 두고 있다. 산업안전·연금관리처럼 노사 쌍방에 도움이 되는 업무에 종사하는 이에 한해 근로 시간 면제(time-off)라는 방식으로 사용자가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허용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사용자가 노조 전임자에게 급여를 주고 있다. 최종태 노사관계선진화위원장은 “노르웨이 노조 전임자는 산업안전이나 고충처리 업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미국이나 캐나다의 노조 전임자와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사용자단체는 2010년 초부터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을 법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가 고객이 되는 지역 단위 노조 공동의 수익 사업을 벌여 재정 자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사용자단체의 입장이다. 노사 관계 전문가들은 국내 노조 전임자 수에 거품이 있다고 지적하고 임금 지원이 중단되면 전임자 수도 현실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금까지 노조 전임자 수 확대와 전임자 급여 지원은 노조 투쟁의 전리품 성격이 강했다. 미국 자동차·철강업체 단위 노조 전임자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현대차 전임자 90명은 지나치게 많다. 현대차 노조는 또 1백명당 한 명씩 대의원을 선출한다. 3백~4백명에 이르는 대의원들은 사실상 사업장 업무에 종사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단체는 “전임자 임금 지급은 노사 자율 협상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지 법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다. 지금 1백인 미만 영세 기업 노조의 절반이 노사 자율로 노조 전임자에게 급여를 주고 있다. 노동자단체는 이 조처가 기업 경영에 부담인지에 대해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6월 총파업까지 거론되는 와중에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까지 불거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은 노조 재정 자립 방안과 함께 쌍둥이처럼 논의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그리 심하지 않다. 사용자와 노동자단체의 이해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교섭권이나 파업권이 부여되는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제3의 노동자단체가 생길 소지가 생긴 탓인지 기존 노총은 복수노조 허용 규정이 연기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사용자단체도 교섭 대상이 많아지면 노사 협상 타결에 시간 낭비가 발생할 소지가 있어 복수노조 연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용자단체는 복수노조 연기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을 연계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복수노조가 허용되더라도 노조 전임자 임금은 지급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탓에 6월 ‘하투’의 전선은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처우 개선이라는 시끌벅적한 동쪽이 아니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둘러싸고 물밑에서 협박과 타협을 주고받는 서쪽에서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사저널 이종현

사용자단체나 노동조합은 지금 ‘노사관계선진화위원회(노사선위)’가 조만간 발표할 공식 견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노사 관계 전문위원 16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에 따른 노조 재정 자립과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노사선위는 지난해 10월29일 노사정위원회 산하로 설립되어 8차에 걸친 회의를 가지면서 까다롭기 그지없는 안건에 대한 의견을 조율하고 있다. 그 사이 선진 노사 관계가 정착된 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북유럽 3국을 실사했고, 미국과 캐나다의 노사 관계 규정을 연구했다. 최종태 노사선위 위원장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용자와 근로자 위원을 다독거리며 공익위원 위주로 노사선위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난 5월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최위원장을 만났다.
 
노사선위가 연구하는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에 따른 노조 재정 자립 방안과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은 언제 나오는가?

6월 넷째 주에 노사선위 의견을 내겠다. 이와 관련해 5월29~30일 전체 위원이 참석하는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이 논의 결과를 토대로 6월4일 9차 노사선위 전체회의를 연다. 6월 셋째 주 호주의 노사 관계를 실사하고 나서 노사선위 견해를 발표할 것이다. 2010년 복수노조 허용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규정이 발효되면서 그 후속 조처인 교섭창구 단일화와 노조 재정 자립 방안을 노사선위가 노동부에 제출하면 노동부장관은 이 의견을 토대로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국회는 해당 법안을 심의·의결하는 일정이다.

위원회 내부에서 근로자 위원과 사용자 위원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는데, 합의안을 낼 수 있겠는가?

근로자나 사용자 위원은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공익위원의 역할을 기대한다. 양자가 합의할 수 있는 대안을 연구와 토론을 통해 만들어가고 있다. 이견을 좁히지 못해 위원회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면 근로자 위원, 사용자 위원, 공익 위원이 각자 견해를 제시하는 것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2009년 세계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노사 관계 부문에서 57개국 가운데 56위를 차지했다. 노사 관계 선진화를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르웨이 노사 관계 실사 과정에서 노르웨이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 관계자를 면담했다. 노르웨이 노동조합 대표는 뜻밖에도 기업의 경쟁력과 생산성 향상을 강조하고 양보 교섭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사용자단체 대표는 노동 조건 개선이나 노동자 권익 향상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 누가 노조 대표이고 누가 사용자 대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상생이나 협력에 기초한 노사 관계 모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노사 관계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금교섭 시기만 되면 노조는 ‘총파업’이나 ‘투쟁’을 선언하고 정부는 ‘강경진압’이나 ‘원천봉쇄’로 대응하는 악순환이 중단되지 않는 한 한국은 노사 관계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단체는 이념 투쟁을 포기해야 하고 사용자는 노조의 건실한 발전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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