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껏 상상하게 하는 캔버스 위의 ‘유희’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9.06.02 17: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유전 / 픽셀 모자이크 회화 등으로 팝아트 미학 펼쳐

▲ 두 사람의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화 시리즈 중 . ⓒ이화익 갤러리 제공

지난 1997년 늦가을, 인사동의 어느 갤러리에서 <6인의 큐레이터가 선정하는 21세기 미술의 주역> 전이 열렸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당시 그러한 전시들이 곳곳에서 줄을 잇고 있었지만, 유독 이 전시가 필자에게 기억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이 전시에 초대된 작가 중 한 명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 드라마틱하게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다. 서른을 갓 넘긴 지방의 무명 작가가 그 전시의 예언대로 국제적 명성을 얻는 유명작가로 변신한 기적이 일어났다. 그 작가의 이름이 바로 김동유이다.

2006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이 추정가의 25배가 넘는 가격인 3억2천만원에 낙찰되어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 후 그의 앞길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작가는 마흔의 나이에 명실 공히 우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작가의 전형적인 양식은 픽셀 모자이크 회화이다. 일견 그의 작품은 팝아트 미학을 자신의 예술철학으로 흡수했으며, 팝아트 거장들의 작업을 오늘의 디지털 패러다임에 섬세하게 접목시켜 팝아트 자체에 깊이와 가능성을 더하는 성취를 보인다.

작가의 팝아트적인 픽셀 회화는 다중적인 컨텍스트를 설정하고 있다. 우선 수많은 픽셀의 이미지들이 집적되어 하나의 전체 이미지를 만들어주는데, 그것은 우리 대중이 미디어를 통해 접해온 친숙한 스타의 이미지들이다. 앤디 워홀이 즐겨 다루었던 마릴린 몬로나 존 F. 케네디, 체 게바라,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 등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앤디 워홀은 마릴린 몬로의 이미지를 즐겨 다루었지만, 그것은 마릴린 몬로를 그린 것이 아니다. 워홀이 그린 것은 다름 아닌 매스미디어상에 나타난 스타들의 초상적 이미지이다. 즉, 이미지의 이미지였으며, 몬로의 개성을 그린 것이 아니라 미디어 메커니즘의 특징을 그린 것이다.

바로 그러한 미디어의 특징은 주지하듯 반복적이고 다중적이다. 워홀이 코카콜라 병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표현했던 것에서 보듯 미디어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의 무수한 반복과 집적은 결국, 오늘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풍경화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팝아트의 맥락은 이제 20세기 미술사의 고전이 되었다. 스크린 이미지를 반복하는 앤디 워홀이나 만화 등의 인쇄물에 나타나는 망점들을 부각시킨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회화 방법은 너무나 익숙하다.

이미지의 다중적 조합이 주는 묘미

▲ ‘구겨진 명화’ 시리즈 중 . ⓒ이화익 갤러리 제공

김동유의 작품은 그들의 회화 방법을 패러디하거나 리메이크하면서도 훨씬 존재론적 깊이가 있고, 깊이가 있다 싶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코믹한 이미지들의 다중적 조합이 보는 묘미와 담론적 가치를 함께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작은 픽셀 이미지들이 집적되어 하나의 거대한 초상적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내용도 나름으로 성공적인 리메이크일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픽셀 이미지와 전체 이미지를 다르게 가져가는 재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방법은 보기에 따라서 어떤 존재론적 논증의 방법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하나의 상상적이고 유희적인 조합 놀이일 수도 있다.

이화익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12번째 개인전(5월21일~6월10일)에서도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마릴린 몬로 vs 마릴린 몬로>에서 픽셀마다 동일인의 다양한 표정들이 집적된 결과는 인물의 주체와는 상관없이 생산되는 상투적인 클리세 이미지로 귀결되고 마는, 미디어 메커니즘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 읽힐 수 있다. 담론상으로 보면 후자와 같은 류의 방식으로 읽히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며, 전자와 같은 독해는 담론 밖의 개별적 인상이나 반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양식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픽셀과 전체 이미지가 다른 것이다.

<마릴린 몬로 vs 마오>에서 마오쩌뚱과 마릴린 몬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양식의 작품들에는 몬로/마오의 조합 외에도 그레이스 켈리/프랭크 시나트라, 그레이스 켈리/클락 게이블, 다이아나/엘리자베스 여왕, 마릴린 몬로/케네디, 붓다/마릴린 몬로 등의 다양한 조합이 있다. 이같이 상이한 인물들의 조합은 일반화시켜 말하기 어렵다. 어떤 것은 젠더의 문제, 어떤 것은 스캔들, 또 어떤 것은 작품 배역, 심지어는 전혀 조합의 실마리 자체가 모호한 경우까지 다양한 관계들이 설정되고 있다. 바로 이처럼 예측하기 힘든 무작위적 조합과 집합 속에서 하나하나가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유희에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 김동유가 다른 팝아트 작가들과는 상이한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풍부한 내러티브의 맥락들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독자적 양식이 특정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결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작가는 존재와 이미지 간의 괴리, 혹은 이미지와 이미지 간의 상호 작용들에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어왔다. 실험이라면 실험이랄 수 있는 많은 과정이 있었다. 현재 작가의 픽셀 이미지 작품들이 작가의 중심적인 양식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초기에 추구했던 작업들 역시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초기에 작가가 보여준 작품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이중적인 이미지의 인터액티브 그림이 있었다. 그림을 왼쪽에서 보는 것과 오른쪽에서 보는 이미지가 달라서 관람자의 움직임과 함께 그림의 내용이 바뀌는 것이었다.

아울러 <Crumpled Mona Lisa, 2009>에서 보듯 일정한 이미지 위에 비닐이 코팅되거나 덮인 채 구겨진 이미지를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다중적인 의미층을 가진다. 존재와 이미지 간의 괴리와 혼돈이라는 맥락과 함께 전통미술에 대한 테러리스트라 일컫는 마르셀 뒤샹의 패러디를 연상케 하는 맥락을 지니고 있다. 

김동유의 등장은 우리 미술계에 여러 가지 의미를 준다. 우리 미술계는 마치 신분제처럼 작가의 출신 학교나 가문 등의 조건이 작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작가가 성장하고 거장에까지 오르는 데는 일정한 포맷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의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작가가 갖추고 있는 사회적 조건들이 중요한 것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김동유는 작가의 재능과 노력만으로도 우리 미술계의 벽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로지 작품 세계만으로 인정을 받았기에 그의 성취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