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준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6.0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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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죽음 꿈꾸는 ‘웰다잉’ 문화 확산…사회·복지·종교 단체, 강좌·상담으로 도와

▲ 아름다운재단이 개설한 ‘아름다운 이별 학교’에 참여한 수강생들. ⓒ시사저널 임준선

억만장자인 재벌 사업가와 자동차 수리공이 죽음을 앞두고 암 병동의 병실을 함께 쓰게 되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다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각자 살아온 환경은 너무 달랐지만 꿈을 잃어버린 것은 똑같았다. 이들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시한부 생명을 사는 두 사람에게 ‘버킷리스트’는 사치이자 허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은 ‘병원 탈출’이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자’ ‘죽기 전에 서로의 꿈을 실현해보자’라는 욕망이 솟구쳤다. 병원을 뛰쳐나온 두 사람은 긴 ‘꿈의 여행길’에 오른다. 사냥하기, 문신하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예쁜 소녀와 키스하기 등 자신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해나가면서 인생의 기쁨,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달아간다. 지난해 4월에 개봉된 영화 <버킷리스트>는 ‘웰다잉’(품위 있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금기의 단어였다. 가장 싫어하는 숫자는 ‘4’자이고, 건물 엘리베이터에도 4층은 ‘F’로 표기되어 있다. ‘4’가 ‘死(사; 죽음)’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 기피하고 있다. 상가에 가는 것을 ‘재수 없다’며 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만큼 ‘죽음’을 두려워하며 경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최근 ‘죽음’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대학에는 죽음을 연구하는 학과까지 생겨났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웰다잉’은 현대인의 화두로 떠올랐다. 김추기경은 선종하기 전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장기 기증을 하고 떠나면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 ‘잘 먹고 잘 살자’라는 ‘웰빙’(Well-being)에서 ‘품위 있게 죽자’라는 ‘웰다잉’(Well-dying) 문화가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대법원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까지 나왔다.

갑작스런 죽음 대비해 평소에 차근차근 준비해야

▲ 가정 방문한 호스피스가 말기 암 환자를 돌보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그렇다면 진정한 ‘웰다잉’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품위 있는 죽음’이 될까. 전문 호스피스들은 “불치의 병에 걸린 후의 ‘웰다잉’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행동이다”라고 충고한다. 웰다잉은 연령에 관계없이 ‘평소에 꾸준히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웰다잉’이 곧 ‘웰빙’이라는 것이다.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은 “사람은 누구나 한 번 태어나고 죽는다. 무섭고 두렵다고 피했다가 갑자기 죽게 된다면 본인이나 가족에게는 원망과 한이 남게 된다. 만약 사랑하는 가족에게 유언장 하나 남겨놓지 않고 죽었다고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웰다잉은 평소에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어느 날 닥쳐온 죽음, 예고 없는 죽음이 얼마나 큰 불행을 몰고 오는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알기가 쉽지 않다. 실제 시골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건 하나를 살펴보자. 1987년 10월쯤 전북 익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택시 운전을 하던 스무 살 청년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야유회를 다녀오던 이 아무개씨는 커브 길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의 죽음은 더 큰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씨가 죽은 후 그 어머니는 술로 살다시피 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보다 평소 아들을 구박했던 죄책감 때문에 더 괴로워했다. 이씨에게는 형과 동생이 있었으나 둘은 공부를 잘했다. 부모는 항상 이씨를 ‘바보’ ‘병신’ 취급을 했고, 평상시에도 “나가 죽어라”라는 말을 밥 먹듯이 했다.

그러다가 실제 싸늘한 시체로 부모 앞에 나타나자 그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 용서해라’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결국, 이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두 달 후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과 부인을 잃은 슬픔에 방황하다 사기를 당해 재산의 거의 전부를 잃게 되었다. 그 후 이씨의 큰누나마저 병으로 죽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났다. 준비 없는 죽음이 부른 가족의 비극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시사저널>이 취재한 ‘웰다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죽음을 초월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고 말한다.

경기도 안산시에 사는 주부 양정임씨(60)는 지난해 한 단체에서 개설한 ‘죽음 준비 교육’을 수강했다. 양씨는 종교단체에 소속되어서 ‘호스피스’로 봉사 활동 등을 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남들보다는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깊이 알고 성찰하면서 인생의 지표가 1백80˚ 바뀌었다.

그는 “우선 소유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내 돈을 주고 샀지만 어차피 죽을 때는 벗어놓고 간다. 잠시 빌린 것이다. 그래서 악착같이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라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내 삶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다 풀렸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다가서니 고통과 근심이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 납골당을 방문한 ‘하늘 세상 엿보기’ 수강생들(왼쪽)과 ‘죽음 준비 학교’의 임종 노트에 쓴 유언장(오른쪽). ⓒ성민종합사회복지관 제공

죽을 준비하다 보면 행복 찾고, 삶에 대한 애착도 생겨

양씨는 유언장을 미리 써놓았다.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유언장을 쓴다는 자체가 망설여졌다. 그런데 막상 써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내가 죽더라도 자식들에게 엄마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전해줄 수 있다. 자식들은 ‘뭐 벌써 그런 것을 쓰느냐’라며 핀잔을 주었는데, 며느리는 ‘참 훌륭한 일을 하셨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라고 한다.

양씨는 요즘 환갑의 나이에 꿈이 하나 생겼다. 소외받는 사람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으나 용기를 냈다. 그는 얼마 전에 ‘100원의 행복’이라는 모임을 추진하고 있다.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소외받는 이웃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례를 대신 치러주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

경기도 광명에 사는 이 아무개씨(54)는 약 2년 전에 병원에서 불치병 판정을 받았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음의 병까지 깊어져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고, 자포자기 상태까지 갔다. 그러던 중 한 지상파 방송에서 불치병에 걸린 노인이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지금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만큼 몸과 마음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씨는 “처음 병원에서 불치병 판정을 받고 나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차마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못한 채 술과 담배에 의지해서 살았다. 집사람이나 아이들에게 짜증 내는 일이 많았다. 그때는 정말 살겠다는 희망을 버렸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심한 환자, 나이든 환자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 다음부터 ‘마지막’을 준비했다. 유서를 미리 써놓고, 주변 정리를 했다. 지금은 장례 비용을 마련해두기 위해 틈틈이 일도 나간다. 그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척이나 친구들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준비를 하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전에는 가족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너무 행복했다. 삶에 대한 애착도 생겼다. 이제는 봉사활동에도 나서려고 한다”라며 새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부산에서 노인요양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하인숙씨(51)는 지난해 동부산대학교 장례행정복지학과에 입학해서 현재 2학년에 재학 중이다. 하씨는 지난해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때로 기억한다.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혼자 속으로만 앓아왔는데 학과 수업 중에 모든 것을 토해내게 되었다. 교수님들이 갇혀 있던 마음을 열게 했다. 그 뒤 친구들이나 가족 또는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집에서는 가족들과 유언장을 공유하면서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나라의 ‘죽음 준비 교육’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현재는 주로 사회·복지·종교 단체 등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대상은 주로 노년층이다. 지난 5월28일에는 아름다운재단에서 ‘아름다운 이별학교’를 개강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유언장 쓰기, 영정 사진 찍기, 장묘 시설 방문, 입관 체험 등을 실시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형 병원이나 종교단체 등에서는 말기 암이나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성민종합사회복지관 이현정 사회복지사는 “우리는 죽음을 ‘행복’이라는 단어로 바꿔 부른다. 교육 프로그램도 밝고 경쾌하게 만들었다. 수강생들에게 ‘가족에게 쓰는 영상편지’를 만들어주고 있는데 호응이 너무 좋다. 가족 간의 존재와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다. 아직은 모집에 어려움이 있지만 많은 분이 함께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박은숙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 인터뷰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은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지표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약 15년 전에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고 조용히 죽음을 맞기 위해 산속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욕심, 탐욕, 집착이 만병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 뒤 몸이 호전되자 아예 ‘행복한 죽음의 전도사’로 나섰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잘 죽는 것’이 곧 ‘잘 사는 길’이다. 이것이 ‘웰다잉’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죽게 마련이다. 죽음을 준비하면 성찰하게 되고 세상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진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는 모든 짐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자나 가족에게 한이 맺힌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준비하면 희망이 보인다.

‘죽음 준비’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하면서 준비할 방법은 없는가?

하루하루 ‘임종 노트’(죽음의 노트)를 쓰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의 일상생활을 적는 일기와는 다르다. ‘임종 노트’는 일종의 유언장처럼 생각하면 된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종 노트를 쓰면 그것이 곧 유언장이 되며, 항상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다. 품위 있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들은 실제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가?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떠난다. 그래서인지 장기 기증을 하는 분들도 꽤 있다. 내세에서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금기에 가깝다.

‘웰다잉’은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웰다잉’이 왜 필요한가를 이해시키고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대학에도 ‘죽음학 강의’ 등을 개설해야 하고, 효와 예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나라는 오래전에 상가의례가 사라지고 허례허식만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상업화가 판을 친다. 지금이라도 옛 조상들이 가졌던 도덕과 윤리를 되살려야 한다.

 


ⓒ시사저널 박은숙
편안했다. 수의를 입고 짚신을 신고 안대로 눈을 가린 후 관에 눕자 이상하리만치 편했다. 그때 처음 ‘죽는 것은 휴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월2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위치한 사생체험연구소에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입관 체험은 영정 사진을 찍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영정 사진’이라는 말에 왠지 거부감부터 들었다. 얼굴은 잔뜩 굳어지고 마음은 찝찝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웃는 모습이 좋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미소’가 머금어지지가 않았다.

실내의 전등이 모두 꺼졌다. 까만 어둠 속에서 내 앞에 촛불 하나만 켜지고 거기에 임종 노트가 놓여 있었다. 임종 노트는 일종의 유언장인 셈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며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

깊은 한숨과 생각을 반복하며 가까스로 임종 노트를 완성할 수가 있었다.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무표정한 영정 사진을 직접 들고 지하의 모의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모의 빈소는 실제 장례식장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꽃으로 치장된 빈소 위에 영정 사진을 올려놓고 수의를 입고 짚신으로 갈아 신었다. 빈소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고, 실내 공기는 싸늘했다. 어디에선가 음산한 장송곡이 들려오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순간 ‘내가 진짜 죽었구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울컥하며 눈시울이 어른거려왔다.

빈소 뒤에 있는 목관으로 이동하자 내 손과 발을 꽁꽁 묶었다. 눈에는 안대를 씌웠다. 그리고 관에 누웠다. 그런데 세상의 근심 걱정을 모두 벗어버린 듯 관 속은 너무도 편안했다. 잠시 후 드르륵 하며 관 뚜껑이 닫히고 못 박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긴 침묵이 흘렀다. 한 10분 정도 관 속에 누워 있는 동안 온갖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릴 적부터 학창 시절 그리고 지금의 모습까지 파노라마 영상으로 지나갔다. 때로는 후회하고 또 아쉬움과 미련이 있었다. ‘어차피 빈 몸으로 가는 것을 왜 이렇게 욕심을 내고 부딪치며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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