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크고 시련은 많았다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6.0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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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못다 이룬 정치 구상’ 네 가지 / 기득권과의 마찰로 ‘미완’에 그쳐

▲ 지난 2007년 11월5일 외교부 청사에 취재지원선진화 방안과 관련한 신규 출입증 교부 방침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언론 권력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꿈’이 많았다. 바꾸고자 한 것들이 많았다. 특권과 반칙의 시대를 끝내고 때로는 무모하리만치 각자의 역할에 맞는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이런 것들 가운데는 임기 중에 성취한 일도 있지만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 권력과 갈등을 빚다 좌초한 미완의 과제들이 더 많다. 이상주의적이면서 현실 개혁가적인 면모를 보였던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이제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동안 ‘노무현’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마다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은 “성과는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노 전 대통령의 느닷없는 서거를 계기로 평가 작업이 본격화할 흐름이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5월26일 “정치 개혁과 국민 통합 등 노 전 대통령의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마무리되는 대로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재조명 작업에 들어갈 태스크포스팀을 꾸릴 계획이다. 노 전 대통령이 이루려고 했던 대표적인 ‘과제’들, 그가 못다 이룬 꿈은 무엇일까.

▒ 언론 개혁, 그 머나먼 길

▲ 2008년 4월20일 노 전 대통령 부부가 광주 5·18 묘역을 참배했다. ⓒ연합뉴스

봉하마을에서 기자들은 불청객이었다. 아니 천덕꾸러기였다. 노 전 대통령에게 호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MBC, 한겨레, 경향신문 기자들도 서거 당일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봉하마을의 촌로들조차 언론에 대해 강한 불신을 내비쳤다. KBS 중계차는 5월24일, 서거 이틀째를 막 들어선 새벽 1시께에 쫓겨나갔다. 그렇다고 철수할 수는 없었다. 중계차는 분향소에서 1km 이상 떨어진 마을 입구 언저리에 자리 잡았다.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기자들은 더욱 힘겨웠다. 보수 언론의 정치적 공세가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끔 만들었다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서거 당일인 23일에는 감정이 거세진 일부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보수 언론의 기자를 찾기 위해 기자석으로 왔다. 이들은 모여 있는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기자가 뭐야, 작가지. 작가들은 여기 앉을 자격 없으니까 다 나가라.”

보통 정치인은 언론과 공생한다. 악어와 악어새 관계로 많이 비유된다. 반면, 노 전 대통령과 언론은 서로 갈등했다. 노 전 대통령은 권력을 향해 쓴 비판을 자주 했다. ‘언론 권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언론 권력은 비판받지 않는 성역 중 하나라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지론이었다.

특히 보수 언론과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대립했다. 다른 대통령에게는 적용되던 언론과의 허니문 기간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지난 2003년 2월27일, 동아일보는 ‘왜 개혁 불안인가’라는 칼럼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투쟁 맹신, 참여를 앞세운 동원 정치에 대한 경계령을 언급했다. 보수 언론은 취임 초기부터 줄곧 이런 식으로 그를 압박했다. 노 전 대통령의 “대통령 못해 먹겠다”라는 등의 발언은 맥락이 거세된 채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다.

노 전 대통령의 언론 개혁 의지는 대통령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그는 임기 후반에 접어든 2007년 1월23일 신년연설에서 “언론이 대안을 말하는 언론, 보도에 책임을 지는 언론이 될 때까지, 사주의 언론이 아니라 시민의 언론이 될 때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기자실을 통폐합했다. 이는 그동안 보수 언론과 긋던 전선을 전체 주류 언론으로 확대하는 것을 뜻했다. 노 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와 ‘사주의 자유’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언론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주가 특권화하는, 언론이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노사모)의 한 관계자는 “지방 균형 발전, 남북 문제, 지역 화합 등 여러 가지 과제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정책의 영역이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관심 있는 문제는 언론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노사모 등이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기 위해 활동을 계획한다면 언론개혁운동이 상위 순번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 동서 화합을 위한 여러 시도

봉하마을에서 듣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는 다양한 지역색이 묻어나왔다. “이걸 우짜면 좋노”라며 경상도 사투리로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왜 이렇게 허무하게 간다요”라며 전라도 사투리로 탄식하는 사람이 함께 뒤섞여 있었다. 지난 5월24일 음식이 모자란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알려지자 다음 날에는 경상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쌀을 기증하고 전라도에서는 무가 무상으로 배달되어왔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과 물자가 밀려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고질인 지역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정치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이 선택 때문에 그는 항상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해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자 그는 PK(부산·경남)에서는 배신자로, 호남에서는 소수파로 전락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했다가 패배했고,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6년 만에 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종로를 버리고 다시 부산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패했다. 이것이 ‘바보 노무현’의 시작이었다. 고질적인 병폐인 지역주의를 깨는 데 헌신한 노 전 대통령을 사람들은 인정했고, 그의 무모한 도전이 역설적으로 그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지역주의를 깨기 위해 온갖 구상을 실현하려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대연정 제의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호남의 유권자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진보와 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비판을 들었지만 지역주의 해결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열정은 상대당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강했다.

2007년 5·18 기념사 가운데 일부분에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퇴임을 맞아야 하는 대통령의 조급함마저 느껴진다. 그는 기념사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하지 않고는 정책과 논리로 경쟁하는 정치, 대화와 타협으로 국민의 뜻을 모아가는 정치, 정치인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 그런 아름답고 수준 높은 정치를 우리는 보기 어렵다. 욕설과 몸싸움, 태업과 공전을 일삼고, 공천 헌금과 정치 부패가 반복되는 그런 정치를 우리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연설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 출신이고 퇴임한 뒤 이곳에서 산다는 의지도 확고한데 왜 부산 정권으로 받아들여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답답한 마음을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금도 영·호남 사이의 벽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공고해진 부분마저 있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지역을 뛰어넘는 조문객들의 열기, 이것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 컴퓨터를 사용하던 노 전 대통령의 모습. 인터넷을 매개로 한 참여민주주의 구현은 노 전 대통령이 최초로 이룩한 업적이었다.

▒ 소통의 정치 ‘민주주의 2.0’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3월2일, 정치권에서 쟁점 법안의 직권상정 여부를 놓고 여야 간에 다수결 처리 논란이 벌어지자 홈페이지인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을 통해 이렇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에서 핵심 원리였다. 그는 국민을 상대로 직접 대화와 타협을 시도했던 정치인이었다. 2003년 2월 영국의 <가디언>은 노 전 대통령의 취임에 즈음해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라는 기사를 실었다. 노 전 대통령이 소통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인터넷이었다.

소통은 그의 정치 방법론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수많은 원군을 만들어주었다. 재임 기간 중에는 직접 댓글을 달며 국민과 이야기했다. 솔직한 표현 때문에 공격도 받았지만,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2004년 사상 초유의 탄핵 정국에서 그를 살리기 위해 여론을 모아냈다.

그는 퇴임 이후 봉하마을에 내려가 일종의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했다. 참여민주주의의 한 방법으로 만든 토론 사이트였다. ‘2.0’이 갖는 함의는 다양하다. 일방향으로 소통하고 권력자를 투표로만 만들어내는 보통의 대의민주제가 ‘민주주의 1.0’이라면 ‘민주주의 2.0’은 ‘웹 2.0’과 마찬가지로 쌍방향성이 구현되어야 하고 권력의 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웹 2.0 환경은 네티즌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네티즌이 일정한 권력을 나누어가져야 힘을 얻는다. 같은 맥락에서 민주주의 2.0은 쌍방향 소통을 통해 시민들, 유권자들이 ‘권력’을 나누어가지는 정치 환경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의미한다. 노 전 대통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단면을 ‘민주주의 2.0’이라는 네이밍에서 엿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가 권력을 문제 삼고 있는 목소리가 높다. 함세웅 신부, 청화 스님, 황상익 서울대 교수 등 사회 인사 100여 명은 5월2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 정부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이들은 “검찰이 권위주의적 통제를 자행하는 현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기획 수사를 강행해왔다”라고 규정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5월2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검찰 수사가 전직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잘못은 없는지 그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라는 견해가 60.0%였다. ‘법 절차에 따른 정당한 검찰권 행사였으므로 별도의 책임 규명은 불필요하다’라는 입장(34.7%)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 2008년 11월28일,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찾아온 일반 국민과 사저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런 탈권위적인 모습은 노 전 대통령의 ‘조문 신드롬’을 불러온 요인 중 하나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 권위주의의 해체, 그리고 개헌

“현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행태가 오히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데 기여한 부분이 있지 않겠나.” 봉하마을에서 만난 민주당 관계자는 봉하마을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다음 날인 5월24일 봉하마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유모차를 끌거나, 자녀들의 손을 잡은 가족도 보이고 연인과 친구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오는 조문객들도 많았다. 휠체어를 타거나 다리를 절룩거리며 오랜 시간을 걸어 조문하는 장애인도 볼 수 있다. 마치 지인의 장례식장을 찾는 듯한 분위기에서 ‘전직 대통령’이 가지는 위압감이나 권위를 의식하는 모습을 느낄 수 없었다. 
반대로 권위의 상징인 정치인들은 봉하마을에서 그 권위를 벗어야 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분향소까지 차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모두 걸어서 들어와야 한다”라는 말에 결국, 차에서 내려야 했다. 봉하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슬 퍼런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당당하게 맞섰다. “카메라 찍히려고 왔냐” “너희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냐”라는 조문객들의 반응에 오히려 권력자들이 당황해야 했다.

경찰 간부들이 서너 시간을 기다린 조문객들보다 우선적으로 조문을 하자 “너희도 줄서라”라며 야유가 쏟아졌다. 이들을 말리기 위해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과 김현 전 춘추관장이, 어떤 경우에는 문재인 변호사가 직접 나서야 했다. 더러 조문객 자리에 앉아 있는 민주당 최고위원 쪽으로 가서 “반성하라”며 호통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봉하마을 안에서는 모두 권위의 감투를 내려놓아야 했다. 고급차가 즐비한 서울 역사박물관의 분향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노 전 대통령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탈권위적인 모습이 노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때 지지율이 하락한 한 원인이었다고도 본다.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희화화되고 그것이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다시 지지율이 하락하는 악순환이 나타났다”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그의 서거 뒤 국민은 노 전 대통령 생전의 소탈한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기리고 있다. 5월27일 공개된 노 전 대통령의 비공개 사진들은 ‘바보 노무현’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했다. 각종 포털 사이트나 블로그에는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추억들을 적은 경험담이 올라오고 있다. 노 전 대통령과 사사로운 인연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점에서 그의 접촉면이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추억을 통해 ‘바보 노무현’이 재조명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정치적인 맥락에서 노 전 대통령의 탈권위는 권력 분점이었다. 대통령 임기 동안 끊임없이 권력 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을 제안했지만 정치권으로부터 번번이 거부당했다.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내려놓겠다”라는 제안은 정략적인 발언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총리에게 국정 운영과 내각에 관한 내치의 권한을 주고 자신은 외치에 집중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실천했지만 개헌의 이해득실 싸움에서 항상 지곤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치적인 탈권위 부분을 다시 화두로 등장시켰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5월27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 그리고 앞으로 우리 정치 형태의 변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라고 지적하며 개헌 문제를 이슈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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