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가방 안 메고 학교 갈 날 온다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6.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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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주, ‘교과서 디지털화’ 추진

▲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 ⓒEPA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 클라리타 시의 발렌시아 고교 10학년(한국의 고1) 클라라 콜드웰 양(16)은 학년 말 시험이 시작되는 지난 5월2일 한 해 동안 메고 다닌 교과서 4권을 한꺼번에 꾸려 학교로 가져갔다. 도서관에 반납하기 위해서였다.

교과서 4권의 무게는 약 10㎏. 다른 공책이나 학습 도구를 합치면 15㎏이 넘는다. 매일 이 정도의 짐을 지고 다녀야 했던 고생이 이날로 끝난다. 시험이 끝나면 곧 방학에 들어간다.

클라라는 교과서를 도서관에 내려놓으면서 어쩌면 내년부터는 이런 고생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뉴스 때문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최근 이색적인 교육 정책을 발표했다. 초·중·고 교과서를 모두 디지털화해 학생들에게 무료로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공립학교는 매년 8월 학년 초가 되면 각 과목 교과서를 무료 대여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학년이 끝나면 이 교과서를 회수해 후배들에게 넘겨준다. 의무 교육 관련 법령에 따르면 정부가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각 주 정부는 교과서 구입 비용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 고교용 미국사 교과서는 한 권에 1백20달러(15만원) 정도이며, 영어 강독책 등 약간 가벼운 책은 1백5달러(12만원), 수학은 65달러(8만원)이다. 한 학년 공부를 위해 교과서 4~5권을 구입하자면 적어도 5백 달러(60만원)에서 6백 달러(75만원)가 필요하다. 한 가정에 중·고교에 다니는 아이가 셋만 되어도 정부가 부담하는 한 해 교과서 값은 적어도 1천8백 달러(약 2백만원)에 이른다. 한 가정에 취학 연령의 자녀가 5~6명이면 정부 부담액은 곱으로 늘어난다.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 교육 예산은 주 전체 한 해 예산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마모되거나 훼손된 교과서를 대체하기 위해 새 책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만 연간 4억 달러(약 5천억원)가 필요하다. 미국 경제가 전반적으로 나빠지면서 세수가 줄어 캘리포니아 주는 심각한 예산난에 직면해 있다. 학생들에게 제공할 교과서 구입비마저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책 4권의 무게만 10kg 가까워

슈왈제너거 주지사의 새 교과서 정책은 구입 예산을 절약하겠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그는 무거운 책을 메고 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한다고 말했지만 궁극적으로 교육 재정을 개선하는 것이 먼저이다.

슈왈제너거는 이를 위해 우선 디지털 교과서 개발자들에게 교과서 편찬 내용을 캘리포니아 주 학습자료연구회에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학습자료연구회는 자료들을 검토한 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인 오는 8월10일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글렌 토머스 주 교육장관은 일차적으로 잭 오코넬 주 교육감과 테드 미첼 주 교육이사회장에게 수학과 과학 디지털 교과서에 대한 교육 과정 지침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1단계 교과 내용 심사 대상인 기하, 대수 2, 삼각함수, 미적분, 물리, 화학, 생명과학 그리고 지구과학 과목에는 주 교육 담당자 및 주 학습자료연구회의 감독 아래 현역 수학 및 과학 교사들이 심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교과서 내용을 심사하기 이전에 편찬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가 캘리포니아개방교과서계획(COSTP)과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편찬 작업에 들어갔다.  COSTP는 디지털 사업가인 샌퍼드 포트와 디지털 프로그램 전문가 제이 세퍼가 지난 2002년 설립한 비영리 단체로 디지털 교과서의 교과 내용과 제작 및 보급을 담당하고 있다. COSTP는 일단 교과서 편찬을 일반에 개방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제작에 참여하도록 문을 열었다. 이를 위해 위키피디어의 자회사 위키북스와 손을 잡고 첫 단계로 세계사 교과서 제작에 착수했다.

이 계획은 사용자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웹2.0 환경을 활용한 것이다. COSTP-위키북스의 세계사 교과서 웹사이트는 일단 주 정부에서 설정한 디지털 교과 과정을 단원 주제별로 먼저 웹사이트에 올리고, 이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단원에 자료를 직접 등재하도록 하고 있다.

포트 COSTP 회장은 계획이 완료되면 △매년 4억 달러나 되는 주 교과서 구입 예산을 절약할 수 있고, △자료의 디지털화를 통해 교사들이 사용할 교육 자료의 양과 폭을 확대할 수 있으며, △당면한 교과서 부족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앞으로는 디지털 교과서를 읽을 수 있도록 더욱 간편하고 효율적인 휴대용 디지털 교과서가 개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계획 성공하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

▲ 페레비 호프 초등학교를 방문한 미셸 오바마가 3학년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AP연합

교육 전문가들은 이외에 우주과학이나 물리학 등 새로운 사실이나 학설이 나날이 등장하는 과목의 경우 기존 교과서는 내용 추가나 보완이 어렵지만 디지털 교과서는 즉각적인 개정이나 보완이 가능해 교사들의 자료 준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COSTP-위키북스는 현재 사용자가 참여하는 형태인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어의 제작 방식과 거의 같다. 그러나 디지털 교과서 제작 방식이 위키북스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 교과서와 디지털 연구 서적 전문 제작 웹사이트인 플렉스북은 위키북스식의 완전 개방 형식은 물론 개인이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등재하고 자신만의 편찬 및 편집 방식으로 교과서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COSTP의 디지털 교과서 제작 계획은 단순히 캘리포니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있다. 이미 인근 유타 주정부에 자문을 한 데 이어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 미국 내 디지털업체와 빌 게이츠 재단 그리고 외국 대학이나 정부의 요청을 받고 자문에 응하고 있다. 특히 같은 영어권인 영국과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가 관심을 표시하고 있고, 중국 상하이의 동중국 대학도 COSTP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COSTP가 지금까지 자문에 응한 국내외 단체는 모두 17개에 이른다.

슈왈제너거의 계획이 성공하면 디지털 교과서는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물론 세계 각국에서도 따를 가능성이 있다. 캘리포니아 주 교육계를 비롯한 학부모들은 슈왈제너거의 계획이 디지털 세상의 신교육 개념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한 경고나 비판도 없지 않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찬사를 겸한 경고 사설을 실었다. 디지털 교과서는 시대에 걸맞게 참신하지만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나 간섭으로 본래의 취지를 희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위키피디어 방식의 위키북스의 편찬 작업이 일반에 개방되면서 등재되는 자료의 신뢰도가 떨어져 주 정부의 교과 내용 심사가 지나치게 엄격해질 가능성에도 경고를 보냈다.

디지털 교과서를 교실 학습에 이용하려면 학생 개개인에게 컴퓨터가 지급되어야 한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 각 공립학교의 경우 컴퓨터 보급 대수는 전체 학생 수의 4분의 1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교과서의 디지털화로 교과서 구입 비용은 절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컴퓨터 구입 비용이 교과서 절약분을 훨씬 웃돌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포트 회장이 말한 새로운 디지털 교과서 리더기가 어떤 형태로 개발될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교과서 디지털화는 성급한 결정이라고 비판자들은 지적한다.

슈왈제너거의 계획은 장애에 부딪치고 있지만 참신성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의 발표대로라면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공립 초·중·고 교과서를 디지털로 바꾸는 최초의 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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