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믿을 원산지 표기 보약 먹기가 겁난다
  • 석유선 (의학 칼럼니스트) ()
  • 승인 2009.06.0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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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재, 중국산 식용이 한국산 약용으로 둔갑해 건강 위협

▲ 서울 제기동 약령시장에서 원산지를 표시·판매하고 있는 한약 재료들. ⓒ시사저널 박은숙

봄이나 여름이 되면 기력이 딸린다는 사람들은 흔히 보약을 지어 먹는다. 보통 탕약이나 환으로 복용하기 마련인데, 그 속에 과연 어떤 한약재가 들어갔는지를 육안으로 식별하기란 쉽지 않은 일. 특히 일반 한약재상이나 재래시장을 통해 구입하면 말 그대로 ‘며느리도 모르는 일’이 되고 만다. 그저 한의사나 한약사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최근 중국산 식용 한약재마저 국산 의약용 한약재로 둔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이마저도 신뢰할 수 없는 형국이다.

하지만 보건당국은 단속인력 부족을 이유로 적시에 손을 쓰지 못하는 데다, 민간에서 시행 중인 ‘한약재 이력 추적 시스템’도 시행 초기 단계여서 한약재 둔갑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수입상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

한약 재료상인 경기도 영천 소재 ㄱ영업사는 식용으로 구매한 중국산 황기 등 4개 품목을 원산지 표기 없이 국산으로 가장해 전국 한의원에 의약용으로 판매해오다 지난 2월 관세청에 덜미를 잡혔다. 모두 2천4백62㎏, 시가 1천8백만원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들은 당국의 단속 직전까지 버젓이 이 제품을 국산 한약재인 양 유통시켜왔다. 이처럼 ‘식용’인 한약재가 버젓이 ‘의약용’으로 둔갑하면 소비자들이 복용하는 의약용 한약재에 섞여 들어가게 된다.

최근까지도 한약재로 쓰여서는 안 되는 중국산 식품이 약재로 둔갑하는 이같은 행태는 전국 한약재 도매상과 재래시장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문제는 이중적인 통관 절차에서 기인한다. 의약재로 사용되는 ‘약용’ 한약재는 수입할 때마다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장의 추천 및 잔류 농약·유해 물질 검사 등을 거치도록 하는 등 절차가 엄격하다.

반면, 동일 물품이라도 ‘식용’으로 수입하는 경우에는, 약용과 달리 수입 첫 회만 단순 식물 검역만을 받도록 하고 있고, 이후 계속 수입을 해도 별도의 검사 없이 들여올 수 있다. 손쉽게 들여올 수 있는 식용 한약재는 상대적으로 약용 한약재보다 가격이 저렴해, 별다른 제재 없이 시중 약재상, 건강원, 한의원 등에 공급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약재로 사용 가능한 물품이 ‘약용’이냐 ‘식용’이냐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그동안 보건복지부는 국내 약초 생산 농가 보호 차원에서 황기와 작약, 산약 등 국내에서 생산이 많이 되는 약재 14종에 대해서는 약용 한약재 수입을 금지해왔다. 그러나 이들 약재는 ‘식용’으로는 수입이 무제한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실상 통관 절차가 허술하고 그로 인해 수입 후 약용 한약재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서울 제기동의 ㄱ한약재상 관계자는 “식용으로 수입된 중국산 제품을 약용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수입상들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해 사실상 식은 죽 먹기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유통되는 이들 한약재 모두를 싸잡아 중국산으로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전했다.

지난해 중국산 약재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는 등 수입 통관 과정의 문제와 이중적 잣대로 인해, 국민 건강에 해가 미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대한한의사협회 이상봉 홍보이사는 “국내 한의원에서는 식약청 허가를 받은 제조업체에서만 포장 판매된 한약재를 써야 한다. 이로 인해  중국산 식용 제품이 둔갑해 한의원 한약재로 공급되는 경우는 극히 미미하다”라고 한약계 전체로 퍼지는 것을 우려했다.

이이사는 “문제는 이같은 제품이 재래시장이나 건강원, 심지어 백화점에서조차 무방비로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분과 효능을 알 수 없는 약재를 한의사의 처방 없이 복용하게 되면 치명적인 부작용을 얻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만약 중금속이나 농약 잔류물 검사를 거치지 않은 중국산 한약재를 국산으로 오인해 장기 복용하게 되면, 보약이 아닌 독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한의학에서 몸이 찬 사람이 몸을 뜨겁게 하는 한약재를 복용하게 되거나, 기와 혈이 막힌 사람이 이와 반대의 효과를 내는 한약재를 복용하게 되면 한의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경우가 있다. 이는 대부분 한의사의 처방 없이 건강원이나 환자 스스로 임의 복용하게 되는 경우로 특히나 중국산 식품이 둔갑한 한약재는 그 효능을 믿을 수 없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이력 추적 시스템 확대와 법제화 시급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아예 약업사나 제조업체가 식용과 약용 둘 중에서 하나만 전문적으로 영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만 식품과 약재의 유통 경로를 원천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것. 즉, 식품 제조·유통 회사와 한약재 규격품 제조·유통 회사의 허가를 구분해서 보건복지부와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각각 관리를 하면 식용 한약재의 약용 둔갑에 따른 유통 문제는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약재 이력 추적 시스템’ 확대와 법제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민간에서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지난 2월부터 고가임에도 수입 의존도가 높은 녹용과 사향에 한해 ‘한약재 이력 추적 관리제’를 시행하고 있다. 추적 관리제는 제조회사의 신고→접수(한의사협회)→라벨 부착(제조회사)→이력 추적 라벨 확인(의료 기관) 등을 거쳐 환자 처방이 이루어지면, 환자 스스로 녹용 및 사향에 관한 원산지 등 이력 추적을 홈페이지(http://www.htrace.or.kr)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현재는 한의협 소속 한의원을 상대로 시행하고 있고,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녹용과 사향에 대한 이력 추적이 100% 가능하지는 않아 시스템 의무 도입을 위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서부일 대구한의대 한의학과 교수는 “한약재 이력 추적제가 의무적으로  실시되면, 한약재의 생산 단계부터 유통·판매 과정 정보를 기록·표시·관리하는 것이 가능해져 한약재 유통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원산지 위·변조를 방지할 수 있고, 안전성 문제가 불거져도 즉각 회수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여론이 높아지면서 민주당 전혜숙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한약재 이력 추적제 도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전의원은 “한의학은 치료의 표준화나 한약재 관리가 체계적이지 못한 실정이다. 한약재가 의약품·식품·화장품 원료 등으로 혼용되는 상황에서 한약재 관리의 차별화·전문화가 절실하다. 오는 6월 이력 추적제 관련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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