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깊숙이 파고드는 대형 마트 ‘포식 본능’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9.06.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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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으로 성장해온 국내 대형 유통업체들이 최근 3년 동안 전국 곳곳에 64개 점포를 늘리면서 지방 중소 소매점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가격 파괴'에서 나아가 SSM(슈퍼슈퍼마켓)으로 동네 시장까지 잠식해가

대형 마트는 우리네 소비를 지배하고 있다. 점포를 빠르게 늘리는 속도전과 지방 중소형 도시에까지 손을 뻗치는 진지전을 동시에 펼치며 전국을 잡아먹었다. 1993년 11월 이마트 창동점에서 처음 문을 연 대형 마트는 2009년 5월 현재 전국적으로 3백93개에 달한다. 30~40년에 걸친 선진국과 달리 우리 대형 마트는 10여 년 만에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가히 현대판 불가사리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동시에 성장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 때문에 비난도 받고 있다.

특히 대형 유통업체가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발을 뻗으면서 지방 상인들은 ‘마트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최근 3년(2006~08년) 동안 문을 연 대형 마트 1백4개 중 수도권은 40개(경기 22개, 서울 12개, 인천 6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64개는 지방에 문을 열었다. 원종문 남서울대 교수는 “마트가 계속 점포를 늘리는 이유는 선도 기업이 되기 위해서 몸집을 불리는 것이다. 선도 기업은 영향력이 엄청나다. 가격 결정에 유리하고 브랜드 파워가 강해지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대형 유통업체가 자기 지역으로 내려오자 지역 상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경기 침체의 타격을 수도권보다 더 크게 받은 지방의 중소 규모 소매점들은 형편이 매우 좋지 않다. 당장 생존에 위기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10일 부산 해운대구 반송 일대의 지역 상인 5백여 명은 한 대형 마트의 입점을 반대하기 위해 모였다. 인근 수영구 민락동 골목시장 상인들도 마트 입점에 반대하며 머리띠를 둘렀다. 서구 서대신동 골목시장도, 동구 초량3동 초량시장 입구에도 ‘재래시장을 죽이는 대형 마트 입점 결사반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부산에서만 보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웬만한 도시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풍경이다. 한 대형 마트 관계자는 “수도권에 점포를 내는 것이 우선이지만 부지를 구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지방의 소비자에게도 편안한 쇼핑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괴물처럼 안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일명 대형 마트의 ‘빨대 효과’에 주목한다. 대형 유통업체에서 소비되는 돈이 지역에서 돌지 않고 서울로 올라가버리는 것을 염려한다. 이 때문에 전주는 지난 3월 ‘대형 마트 지역 기여도 권고 촉진 조례’를 제정했다. 부산, 제주 등 광역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조례를 추진 중이다. 최근 국회에서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을 중심으로 마트의 영업 시간이나 품목 등을 조례로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이 논의 중이다.

대형 유통업체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되고 국내 유통시장이 개방된 1996년 1월1일 이후이다. 외국 유통업체들이 국내에 진출했고, 국내 업체들도 경쟁적으로 외형 확대에 나섰다.

10여 년 전 ‘주력 업종 전환’ 모색하던 대기업들이 ‘출혈 경쟁’

당장 개방 직후인 1996년 1월17일, 네덜란드의 마크로가 ‘한국마크로’라는 이름으로 인천 송림동에 창고형 할인매장을 열었다. 같은 네덜란드의 까르푸 역시 부천 중동 신도시를 첫 도전지로 삼았다. 1998년 7월에는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미국의 월마트가 한국에 진출했다. 해외 유통업체들은 축적된 노하우를 앞세워 공격적으로 나왔다. 신도시 등 목 좋은 곳을 중심으로 땅을 매입하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93~95년 사이 국내 대형 유통업체의 점포는 서울을 중심으로 10개에 불과했지만 유통시장 개방 이후인 1996~98년 3년간 새로 문을 연 곳은 43곳에 이른다.

당시 국내 대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대형 유통업계 시장에 뛰어들었거나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신세계 백화점은 유통시장이 개방된 1996년에 이미 회원제 창고형 할인점인 프라이스클럽과 이마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뉴코아는 킴스클럽을 인수하며, 롯데백화점은 뒤늦게 부산에 연 L마트를 개설하며 마트 시장에 진입했다. LG, 효성, 미원, 한일, 동부그룹 등도 대형 마트 시장 진입을 저울질하며 부지 매입을 검토하고 있었다. 대형 마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1990년대 후반 사양 산업으로 지목되던 섬유나 건설 등을 주력으로 삼은 기업들이 특히 더 그랬다. 거평, 나산, 동아그룹 등이 유통업에 출사표를 던졌다. 거평그룹은 ‘거평유통’을 설립해 1997년 3월 광주에 1호점을 냈다. 나산그룹도 광주를 중심으로 ‘클레프’라는 대형 할인점을 열어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거평마트는 지난 2006년 2월 결국, 등록을 취소했고 나산클레프는 모기업의 부도로 폐업했다.

신도시를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다. 신도시는 대형 유통업체의 오아시스였다. 일산, 분당 외에도 새로 들어서는 신도시에는 어김없이 입점 쟁탈전이 벌어졌다. 현재 수원은 11곳, 용인은 8곳, 안양은 6곳의 대형 마트가 들어서 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는 경기도 고양의 화정동에는 반경 2백m 안에 롯데마트, 이마트, 세이브존 등 세 곳의 대형 유통업체가 이웃해 경쟁하고 있다.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형 유통업체들의 싸움도 치열하다. 지난 3월 롯데와 신세계는 재미있는 땅 싸움을 벌였다. 경기도 파주의 동일한 땅을 두고 롯데는 부동산회사와 임대차 계약을 맺고 신세계는 매입 계약을 맺는 일이 벌어졌다.

신세계는 부동산 개발업체인 ㈜CIT랜드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통일동산 내 53만4천여 ㎡ 중 7만6천여 ㎡를 매입하는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벌어졌다. 이 땅은 지난해 1월 롯데측이 20년 장기임대차 계약을 맺은 곳이었다. 신세계는 이 부지에 경기도 여주의 명품 아울렛 매장의 뒤를 이을 2호점을 낼 생각이었고, 롯데 역시 롯데아울렛 3호점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롯데가 양보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물러섰지만 두 업체의 ‘땅 전쟁’은 업계의 화제였다.

갖가지 업종까지 흡수하며 상권 재편시키기도

대형 마트가 범람하고 출혈 경쟁이 심해지자 1990년대 후반에는 일부 후발 업체의 부도설과 인수·합병설이 나돌았다. 외환위기 이후 장기간 소비심리가 얼어붙자 영세 규모의 대형 마트는 하나 둘 사라져갔다. 부도의 여파는 대형 유통업체만 맞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대형 마트가 부도가 나면 물건을 납품한 지역의 영세업자들도 함께 휘청거렸다.

전국적으로 대형 유통업체가 퍼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세계적 대형 유통업체인 월마트, 까르푸 등이 인수·합병의 대상이 되었다. 이마트는 월마트를, 이랜드는 까르푸를 인수하는 등(이후 이랜드 홈에버는 홈플러스가 인수) 시장은 빠르게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의 3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네덜란드의 마크로가 처음 국내에 발을 디딘 뒤 10년 만에 외국계 유통업체는 대부분 국내 업체와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했다.

업계에서도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전에는 서점은 다른 서점만, 옷가게는 다른 옷가게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같은 업종과의 경쟁에만 몰두하던 데서 이제는 다른 업종과의 경쟁을 고려해야 하는 쪽으로 변해야 했다. 마트는 어지간한 업종을 모두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트가 점점 확산되어 나가자 뜬금없이 용산 전자상가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대형 마트에서는 최저가를 말하며 PC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비록 상품의 종류는 적었지만 친절한 고객 서비스를 내세워 용산 전자상가를 수세에 몰아넣었다. 용산 전자상가는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상품을 구할 수 있었지만, 형편없는 고객 서비스와 바가지 상술로도 악명 높았다. 이런 용산 전자상가에서 AS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쳤다. 집에 찾아와서 PC를 가져가 수리한 뒤 집까지 도로 가져다주는 업체까지 생겼다.

그동안 유통업에 비해 우위에 섰던 제조업도 결국에는 마트에 무릎을 꿇었다. 제조업체는 원래 대형 유통업체를 싫어했다. 대형 유통업체는 물건을 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공급 가격을 낮추려고 한다. 반면, 제조업체는 비싸게 받으려고 한다. 대형 마트가 처음 들어섰을 때에는 마트측과 공급 가격이 맞지 않아 제조업체측에서 물건 공급을 거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3년 11월 국내 최초로 문을 연 이마트 창동점의 경우에 시장 점유율 1위였던 라면이 들어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형 유통업체가 활황을 맞자 제조업체들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96년 개점한 킴스클럽은 롯데·크라운·해태·오리온 등 당시 유명 제과업체에 공급 가격을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결국, 킴스클럽은 미국의 프링글스 등 해외 과자를 어쩔 수 없이 판매했는데 이것이 뜻밖에 대박을 터뜨렸다. 오히려 아쉬워진 쪽은 국내 제과업체였다. 결국, 제과업체 모두가 킴스클럽의 가격 조건에 따라 제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계약하면서 ‘과자 전쟁’은 유통업체의 승리로 끝났다. 유통 경로를 둘러싼 파워게임에서 유통업체가 제조업체보다 우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대형 마트는 날개를 달았다.

우리나라에 대형 유통업체가 진출한 것은 불과 16년밖에 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경우 이미 그 역사가 30~40년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짧은 역사이지만 외형적인 성장은 그들 못지않다. 그래서 마트업계 관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트가 우리 시장을 지배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라고. 그는 “필연적이다. 유통의 발전 단계상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일단 마트는 서구식 소비문화의 산물이다. 유통시장의 개방은 필연적으로 선진국형 대형 마트 시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즉, 유통시장이 서구식으로 재편되는 것은 시간 문제인 셈이었다.

여기에 재래시장과 슈퍼마켓의 취약함도 마트에게 도움을 주었다. 지난 2006년 산업연구원이 펴낸 ‘유통산업 구조 변화와 업태별 핵심 이슈’라는 보고서는 “우리 사회는 재래시장과 백화점이라는 양극화된 마켓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할인점은 그 중간에 위치한다. 슈퍼마켓 역시 골목시장을 차지하고 있지만 적절한 식료품을 공급하는 측면에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당시 국내 환경은 대형 유통업체가 정착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1993~96년까지 들어선 18개의 대형 마트를 살펴보면 1993~95년에는 서울(도봉구, 영등포구, 서초구, 마포구 등)을 중심으로 문을 열었지만, 1996년의 경우 신규 개점한 8곳 중 5곳이 경기도에 들어섰다. 유통시장이 개방되고 대형 유통업체가 확산될 무렵 서울 주변의 신도시는 소득 수준이 높은 거주자로 가득했지만 상대적으로 배후 상권이 열악했다. 경기도는 부지 확보도 서울보다 수월했고, 아파트촌이라는 안정적인 고객이 있어 대형 마트가 초기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정부도 가격 파괴 바람이 물가 안정에 도움을 준다고 판단해 자연녹지 지역에 대형 마트 건설을 허용하는 등 유통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각종 세제 지원책을 마련했다. 이런 환경이 할인점의 확산 추세를 가속화시켰다. 이런 추세가 계속 유지되면서 경기도는 3백93개의 대형 마트 점포 중 100개가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62개)을 압도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까지 ‘공략’하는 것은 ‘시장 포화 상태’ 의심케 해

마트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시장의 포화 상태 여부를 의심하게 한다. 지난 2003년 신세계유통산업연구소는 대형 마트 1개당 적정 인구 수를 10만명으로 보고 전국의 대형 마트 포화 점포 수를 4백70개로 추정했다. 같은 해 대한상공회의소 연구보고서는  마트 1개당 적정 인구수를 8만명으로 보고 전국 포화 점포 수를 5백98개로 추정했다. 현재 국내의 총 점포 수(3백93개)는 포화 상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반면, 이미 대형 마트 시장이 과포화 상태라는 주장도 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월마트의 철수를 토종 유통업체의 승리로 볼 수도 있지만 이미 포화 상태인 우리 시장보다 블루오션인 중국에 전념하려는 정책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나갈 때 너무 쉽게 손을 털고 나갔다”라고 말했다. 롯데마트와 홈플러스가 SSM(슈퍼슈퍼마켓)으로 일찌감치 진출한 전략도 결국, 대형 마트의 포화 상태를 의식한 전략적 전환이라는 지적이 많다. SSM을 통해 골목의 유통까지도 책임지겠다는 대기업의 경영 전략을 ‘포식’이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점점 드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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