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바람이 ‘무기력 정국’일으켜 세울까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6.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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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모두 필요성 인정하는 분위기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청와대에서 생각에 잠긴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요즘 여당 인사들이 느끼는 위기감이다. 혼돈으로 치닫는 6월 정국에서 그 돌파구의 하나로 ‘개헌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의회 정치가 사실상 실종된 상황에서 국회는 개헌 카드를 꺼내들 태세이다. 이미 분위기는 상당 부분 무르익었고, 또 대의명분도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국회의장실 주변에서는 “7월17일(제헌절)을 기점으로 정국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개헌 논의를 주도하겠다는 뜻이다. 의장 직속 기구인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제헌절에 맞춰 발표할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대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전문가들은 일단 긍정적이다. “현재 여야 정치권에서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고, 갈수록 더 확산될 것이다”(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향후 정국 전환 카드로 개헌론이 가장 유용한 카드임에는 틀림없다”(이경헌 정치컨설팅회사 ‘포스커뮤니케이션’ 대표) 등 공통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민심과 ‘반(反) 이명박 정부’ 정서, 여기에 현 정부가 좀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주기를 바라는 목소리에다가 침묵하는 다수의 부동층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공통분모로 개헌론이 아주 적절한 카드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개헌 논의가 동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네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당과 야당, 청와대 그리고 국민 여론이다. 지난 2007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을 때, 야당인 한나라당은 “참 나쁜 대통령이다”(박근혜 전 대표)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당시 여야는 차기 국회(18대)에서 개헌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국민 절반 이상도 “개헌이 필요하다”

▲ 6월1일 오후 당선 후 처음 만나는 한나라당 안상수(오른쪽),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 ⓒ시사저널 이종현

지금 상황은 또 다르다. 이미 여야는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취임하자마자 헌법연구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여야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미래한국헌법연구회’는 현재 1백86명의 소속 회원을 둘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구회 소속 의원만으로도 개헌 정족수(전체 의석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셈이다. 이미 개헌 발의 정족수인 과반수는 훌쩍 넘어섰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6월 18대 국회 개원 시기에 즈음해서 국회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개헌에 관한 설문조사(제972호 보도)를 실시한 바 있다. 여기서 전체 의원의 78.4%가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당시만 해도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였기 때문에 ‘개헌은 필요하지만, 지금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다수 있었다. 이제는 그런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국회의원 설문조사에서 68.5%가 ‘개헌 가능성이 있다’라고 답했다. 이는 단순히 개헌이 필요하다는 개인 입장 피력의 수준을 넘어서서 실제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현재 정치권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컸다.

<서울신문>이 지난 1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전체 의원의 89.1%가 ‘개헌에 찬성한다’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9명꼴이다.

국민들의 공감대도 날로 커지고 있다. <한국일보>가 지난 6월9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국민의 58.4%가 ‘대통령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 등으로의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반면,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개헌 반대 입장은 29.4%에 그쳤다. 이같은 결과는 지난해 6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와 대비된다. 지난해 조사에서는 개헌 찬성과 반대의 비율이 46.9% 대 40.1%로 팽팽히 맞선 바 있다.

지난 6월1일 KSO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권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묻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의 국정 운영 쇄신’(39.0%), ‘검찰 개혁’(21.6%)에 이어 ‘개헌 필요성’(17.5%)을 세 번째로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 국회 개헌 연구모임인 미래한국 헌법연구회는 지난 3월18일 전북도청에서 지역 순회 토론회를 열고 중앙 및 지방 정부의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연합뉴스

남은 변수는 청와대의 의중이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의 결심이 향후 정국의 주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32쪽 상자기사 참조). 미래한국헌법연구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은 “개헌 논의에 대해 청와대가 관심을 안 둘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청와대가 주도하는 형태도 안 된다. 이것은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청와대의 입장에서는 집권 초기부터 개헌 논의가 이는 것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또, 실제 그런 분위기가 당 지도부를 통해 알게 모르게 전달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비교적 시간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9월 정기국회에 들어가면 시간이 없다. 국회가 청와대 눈치만 보고 할 일을 안 한다면, 의회민주주의가 바르게 자리 잡을 수 없다. 개헌론만큼은 청와대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개헌 논의에 대해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침묵의 저변에서는 부정적 기류가 상당 부분 느껴진다. 향후 개헌 논의가 정국의 동력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다소 어두운 전망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결심에 달려 있어

개헌 일정에 대해서 이의원은 “내년 6월 실시될 지방선거가 데드라인이다. 반드시 지방선거 전까지는 논의를 마쳐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 “지방선거 이후로 넘어가면 대권 주자들이 부상하고 그때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어려워진다”라는 점을 들었다. 미래한국헌법연구회에서 예상하고 있는 개헌 일정은 이렇다. 9월 정기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약 8개월여 간의 활동으로 활발한 논의를 거쳐 지방선거 전까지 합의안을 도출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투표는 지방선거 시기에 맞춰서 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이의원은 “최근 개헌 필요성의 공감대가 더 확산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6월 임시국회에서 앞당겨 개헌특위 구성을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 법제사법위원회의 감사원 국정감사에 참석한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 ⓒ시사저널 이종현

이의원의 우려대로 올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안에 본격적인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개헌론까지 들고 나왔다가는 향후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위기감이 여권을 휩싸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개헌 논의가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는 견해가 제기된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난 19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라는 국민 전체가 합치된 하나의 목표가 있었지만, 지금은 국민 의견이 분분하게 나누어지는 상황이다. 또, 자칫 정치적 오해를 받을 소지도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이런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려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후 ‘개헌 정국’이 올 것으로 보는 견해는 여전히 우세하다. 신율 교수는 “지금의 개헌 논의가 일시적인 현상은 결코 아니다. 우선 각 정파 나름대로의 위기의식이 팽배한 상태인 데다가, 마땅한 정국 전환 카드나 계기가 없기 때문에 갈수록 개헌론은 더 확산될 것으로 본다”라고 밝혔다.

이경헌 대표는 “현재 여야 정당 지지율이 10~20%대에 머무르고 있는  ‘서거 정국’을 빨리 매듭짓고, 정상적인 의회 기능을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후 여야와 청와대 3자의 이해관계가 모두 일치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 시기가 올 10월 재·보선 시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국민이 진정 원한다면…”

청와대는 어떤 생각하고 있나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일고 있는 개헌 논의에 대해 청와대의 입장 표명은 상당히 원론적인 수준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문제는 국민이 개헌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라 쳐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개헌 논의에 대해서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얘기가 다분히 정략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까닭이다. 지금 시점에서 개헌론이 과연 절실히 필요한 문제인지, 또 국민들이 그만큼 개헌을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표시하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 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강원택 교수는 “김형오 의장이 청와대를 의식하지 않고 얼마나 강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역시 키는 이명박 대통령이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경헌 대표는 “김의장을 비롯한 여야가 국회 내에서 한목소리로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서면 청와대도 무작정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궁지에 몰린 청와대가 정국 반전용 카드로 개헌론을 먼저 들고 나올 수도 있다는 전망도 제시된다. 

이경헌 대표는 “여권이 10월 재·보선이나 내년 지방선거에서 만약 패배할 경우, 남은 임기 동안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차원에서라도 개헌론을 수용하거나 오히려 나서서 주도할 가능성도 있다”라고 전망했다. 신율 교수는 “현행 대통령제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 정권이 불행해지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궁극적으로는 청와대도 개헌론에 대해서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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