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유행병 앞에서 팔짱 낀 한국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6.2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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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 신종플루 경보 6단계 격상 정부, ‘주의’ 유지한 채 별다른 조치 없어

▲ 6월11일 마거릿 챈 WHO 사무총장이 신종플루 경보를 6단계로 올린다고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종 인플루엔자 A(H1N1·신종플루)의 양상이 새로운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플루의 세계적인 창궐을 선언한 데 이어 브라질에서는 변종 바이러스까지 출현했다. WHO는 국가·지역 사회·개인별로 행동규칙까지 따로 만들어 준수할 것을 각국에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너무 한가하다. 정부 차원의 지침이나 대처 요령조차 없이 방치되고 있다. 

WHO는 지난 6월11일 신종플루에 대한 경보를 최고 수준인 6단계로 격상했다. 신종플루가 세계적인 대유행병(pandemic·팬데믹)의 단계로 올라갔다는 의미이다. 최고 단계의 발령은 지난 1968년 1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홍콩 독감 사태 이후 처음이다.

신종플루 감염자는 6월15일 현재 76개국에서 3만6천명에 이른다. 사망자는 1백63명이다. 모든 대륙에서 감염자가 보고되었고 전세계 국가 중 3분의 1이 넘는 나라에서 감염자가 발생했다.

WHO는 2005년 제정된 국제보건규칙(IHR)을 개정한 팬데믹 행동규칙(recommended actions before, during and after a pandemic)을 각국에 권고하고 있다. 규칙에 따르면 각국은 정부나 의료계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개인이나 가정이 취해야 할 세부적인 지침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6단계인 WHO의 전염병 경보는 단계마다 5개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5개 카테고리는 계획과 조정(planning and coordination), 상황 관찰과 평가(situation monitoring and assessment), 질병 확산 축소(reducing the spread od disease), 의료 준비(continuity of health care provision), 전파(communications) 등이다. 단계별·카테고리별 행동요령을 정해 지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염병 최고 경보 수준인 6단계에서 개인과 가정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질병 확산 축소’ 카테고리에 속하는 행동요령을 보면, 호흡기질환에 걸린 환자는 외출을 삼가고 다른 가족과의 접촉을 자제해야 한다. 신종플루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있다면 가정 내에서도 격리시키도록 권고하고 있다. 또, 각국 정부는 WHO 가이드에 따른 전염 통제 지침을 국민에게 배포하고, 직장의 근무 형태와 학교 수업 조정 등과 같은 사회적 대책도 가동할 필요가 있다. 항바이러스제를 배포하고 백신을 확보해야 하며, 유사시에는 예방 캠페인을 펴고 백신 접종을 시행할 수도 있다.  

WHO은 이같은 행동요령을 감염국과 비감염국으로 나누어 전하고 있다. 전염 시기와 상황이 국가마다 달라 기존 규칙을 차별화해 적용토록 한 것이다.

변종 바이러스까지 출현해 긴장 국면

▲ ‘WHO 표준 바이러스’를 활용해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 충남대 수의과학대학 서상희 교수. ⓒ연합뉴스

WHO의 전염병 경보 단계는 6단계가 끝이 아니다. 포스트 피크(post-peak period), 2차 유행(possible new wave), 포스트 팬데믹(post-pandemic period) 등 3단계가 더 있다. 바이러스의 특성상 신종플루는 변화무쌍하다.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가 급격하게 확산된다. 또,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가능성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포스트 피크 단계는 팬데믹이 최고점을 찍고 점차 누그러지는 시기를 의미한다. 바이러스의 활동이 약해지고 있어 팬데믹의 의료·사회적 충격을 추스르는 단계이다. 그러나 다시 발생할 수 있는 2차 유행(second wave)에 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 과거 팬데믹을 보면 수개월 동안 활동이 강해지고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특징이 나타났다.

포스트 피크 단계에서 팬데믹 활동이 다시 강해지면 ‘2차 유행기’ 단계가 발령된다. 만일 팬데믹 활동이 꾸준히 감소해서 계절성 인플루엔자 정도로 약해지면 포스트 팬데믹 단계로 접어든다. 일반 독감처럼 통제가 가능한 수준인데, 팬데믹으로 만신창이가 된 의료·사회적 기능을 복구하는 시점이 된다.

WHO의 행동규칙을 토대로 호주 정부는 자체 경보 단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자국민 절반이 복용할 수 있는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이미 구비했고, 앞으로 구비율을 80% 수준으로 높일 계획이다. 홍콩은 외국인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국제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런 와중에 설마 했던 일이 발생했다. 지난 6월17일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한 것이다. 브라질 상파울루 주 정부 산하 아돌프 루츠 세균연구소는 한 환자의 몸에서 신종플루 바이러스 변종을 추출하고 ‘인플루엔자 A 상파울루 H1N1’로 명명했다.

이 변종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변종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 의학계는 긴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변종이 중남미 지역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로 발전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신종플루처럼 전염성이 강하면서 조류 인플루엔자(AI)와 같은 높은 치사율을 지닌 최악의 바이러스로 변할 경우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1918년 스페인 독감의 악령이 되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저널 <네이처> 최신호에서 전문가들은 “신종플루의 변종을 감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항바이러스제의 재고 부족과 백신 생산의 지연 등으로 세계가 팬데믹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WHO가 신종플루 경보 수준을 6단계로 올리자 보건복지부는 평가회의를 열었지만 현 단계인 ‘주의’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나라의 국가재난 설정 단계는 관심(블루), 주의(옐로우), 경계(오렌지), 심각(레드) 등으로 되어 있다(표 참조). 복지부측은 사람 사이에서 2차 감염이 발생하지 않았고, 56명의 감염자가 발생했지만 아직 사망자가 없다는 이유로 낮은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최근 홍콩에서 2차 감염자가 발생했다. 미국 대륙 이외의 지역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감염 환자가 치료를 받는 도중 사망했다.

해외여행자만 ‘관리’하지 말고 사전 대비책 마련해야

정부는 현재 해외여행자에 대한 주의만 강조할 뿐 국민에게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민들 역시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아 신종플루는 국내에서 거의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얼마 전 해외여행자 몇 명이 입국하기 3~4시간 전에 해열제를 복용하고 검사대를 통과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다.

정부는 추경예산 1백82억원으로 신종플루 백신 1백30만명분을 확보하기로 했고, 1만개의 격리 병상을 지정했다. 그러나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손숙미 의원은 “국내 항바이러스제 비축량이 인구의 11%가 사용할 수 있는 5백40만명분으로 WHO 권고치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호주(62%), 영국(24%), 프랑스(23%), 일본(21%), 싱가포르(25%) 등은 권고치 이상의 항바이러스제를 비축했다. WHO는 인구의 20%가 쓸 수 있는 양의 비축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예방 백신 비축 목표량의 3%도 채 안 되는 양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우려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당국으로부터 병상을 확보하라는 공문은 받았지만 하루아침에 100병상 이상을 만들 수가 없다. 입원 환자를 내쫓아야 할 판이다”라고 전했다.

이렇듯 대책과 현실이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종구 질병관리본부장의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신종플루를 계절성 인플루엔자 수준으로 대처하고 있다. WHO의 경보 기준과 우리의 위기 평가 기준은 다르다. 국내에서 유행하는 지경에 이르면 경보 단계를 올리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 WHO가 팬데믹으로 확정한 신종플루를 우리 정부는 계절성 인플루엔자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국민들 사이에는 정부가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주부 이선화씨(40)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이씨는 남편이 일본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콧물이 흐르고 목이 아파 관할 보건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여행은 남편이 다녀왔는데 부인이 걸릴 리 없다. 열도 나지 않아 신종플루로 볼 수 없다고 보건소 직원이 말했다. 그래도 검사를 해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나 신종플루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핀잔만 들었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최욱현씨(48)는 최근 감기 증세가 나타나 동네 의원을 찾았다. 그는 “혹시 몰라 신종플루에 감염되었는지 검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면서 일반 감기약만 처방해주었다. 이러다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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