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 혈전 보다 치명적인 ‘저승사자’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7.0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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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맥 혈전, 국내에는 통계조차 없는 심각한 질환…폐동맥 막으면 2시간 만에 사망하기도

ⓒ그림 남동윤

 “정맥에 생기는 혈전(피떡)이 동맥에 생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전문의들은 정맥 혈전의 위험성이 저평가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정맥 혈전이 폐로 이어진 혈관(폐동맥)을 막으면 갑작스럽게 사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세계 의학계가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 정맥 혈전의 위험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알려야 한다는 지적이 우리나라 의학계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정맥에 혈전이 생기는 것을 정맥 혈전 색전증(VTE·이하 정맥 혈전증)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만 30만명 등 세계적으로 100만명이 매년 이 증상으로 사망한다. 유럽에서는 유방암, 전립선암, 에이즈, 교통사고 사망자를 합한 수보다 많은 54만명이 매년 이 증상을 호소하다 유명을 달리한다. 우리나라에는 정맥 혈전증에 관련된 통계조차 없다.

혈전이 생기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이다. 피가 고이는 정체(停滯), 혈관 손상, 점성 증가 등이다. 동맥에 생기는 혈전은 점성이 주원인이다. 콜레스테롤(LDL) 등으로 혈액이 끈적끈적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굳어진 혈전은 심장혈관을 막아 심근경색을 일으킨다. 콜레스테롤 섭취를 줄이면 동맥 혈전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맥 혈전은 콜레스테롤과 거의 무관하다. 혈액의 정체나 혈관 손상이 주요인이다. 심장이 펌프질을 하기 때문에 동맥의 혈류는 세다. 온몸을 돌아 나온 피는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간다. 펌프 기능이 없으므로 정맥의 혈류는 약하다. 작은 요인으로도 혈류가 멈추기 쉬운 조건이다. 혈류가 멈추면 피가 고이면서 혈전이 생긴다. 고인 물이 썩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표적인 원인이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이다. 오랜 시간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으면 피가 잘 돌지 않아 혈전이 생기기 십상이다. 장시간의 자동차 운전이나 책상 업무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해서 오랜 기간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낸 환자는 정맥 혈전증을 조심해야 한다.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도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므로 혈전이 생길 가능성을 높인다.

암 환자도 정맥 혈전을 조심해야 한다. 암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혈전이 생긴다. 암덩어리에서 떨어져 나간 암세포가 혈관 속에서 혈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일부 암세포는 혈전이 생기기 쉽게 하는 물질을 분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술 등으로 인해 출혈이 생기면 우리 몸에는 혈액을 굳게 하는 혈액 응고 인자가 만들어진다. 혈액 응고 인자는 출혈을 막지만 혈전을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 외상도 정맥 혈전의 원인이다. 혈관에 충격이 가해져 혈액이 잘 흐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비행기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도 한 요인

박윤수 삼성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신경외과·산부인과·정형외과 수술의 대부분은 혈관에 손상을 줄 수밖에 없다. 특히 다리에 있는 장골정맥, 대퇴정맥, 슬와정맥에서 혈전이 잘 생긴다. 안 그래도 혈액의 흐름이 약한데, 고관절이나 무릎관절 수술을 받으면 정맥 혈전이 생기기 좋은 환경이 된다. 혈액 응고 인자가 생기고, 혈관 이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맥 혈전증의 심각한 증상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정맥 중에서도 몸속 깊은 곳에 있는 정맥에서 혈전이 생기는 심부 정맥 혈전증(DVT)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맥 혈전이 폐에 있는 혈관을 막는 폐동맥 색전증(PE)이다.

심부 정맥 혈전증이 발병하면 한쪽 또는 양쪽 다리가 심하게 붓는다. 종아리 뒤쪽에 통증과 열이 생기기도 한다. 심부 정맥 혈전증은 염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를 혈전성 정맥염이라고 하는데 혈관은 물론 정맥 판막도 영구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다. 피가 역류하는 등 심각한 합병증도 생길 수 있다.

이보다 더 위험한 증상이 폐동맥 색전증이다. 정맥에서 생긴 혈전은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 폐로 이동한다. 심장에서 폐로 이동한 혈액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산소를 받아 다시 심장으로 들어온다. 심장에서 폐로 혈액이 흐르는 혈관이 폐동맥이다. 폐동맥이 혈전으로 막히면 호흡곤란과 가슴 통증이 생기고 심하면 사망한다. 폐동맥 색전증이 생긴 환자 중 10~25%는 증세를 보인 지 2시간 만에 사망한다는 통계도 있다.

조현재 서울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동맥이 건강하다고 정맥도 건강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동맥 혈전과 전혀 다른 요인으로 정맥 혈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맥 혈전이 폐동맥 색전증을 일으키면 급사할 수 있다. 누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예방 대상을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라며 정맥 혈전에 의한 폐동맥 색전증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진단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맥 조형술, 초음파 검사, CT 촬영 등으로 정맥의 혈전 여부를 알 수 있다. 혈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혈관을 막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남동윤

대국민용 홍보 지침서 만들어 계몽해야

정맥 혈전증으로 확진되면 항혈액응고제와 혈전용해제를 사용한 약물요법이 기본 치료법이다. 그러나 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또, 경구용 약을 먹는 환자도 정기적으로 혈액의 상태를 검사해야 한다. 이런 불편한 점을 개선한 약이 최근 개발되어 있다. 앞으로는 사용하기 편리하면서도 부작용도 적은 약물이 선보일 전망이다.  

약물요법으로 치료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직접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시술을 하기도 한다. 좁아진 혈관에 풍선이나 스텐트(stent)를 삽입하고 부풀려서 강제로 혈관을 넓히는 방법이다.

또, 혈전이 폐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 필터(umbrella filter)를 정맥에 삽입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한 번 삽입하면 다시 뺄 수 없었지만, 최근에는 삽입 후 2주 후에 제거할 수 있는 필터가 개발되어 있다. 하수도가 막히면 거름망을 교체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맥에 혈전이 생겨도 별다른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폐동맥이 막혀도 뚜렷한 자각 증세가 없다. 다리가 붓거나 가슴 통증이 생길 정도의 증세가 나타나면 이미 혈전이 혈관을 꽉 틀어막은 상태이다. 예방이 중요한 이유이다. 

수술받은 환자는 압박 스타킹을 신어 다리의 혈압을 높여준다. 장시간 눕거나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도 짬을 내서 다리를 움직여 주어야 한다. 혈액의 농도가 진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

전문의들은 무엇보다 정맥 혈전증의 심각성 인식에 방점을 찍고 있다. 환자는 물론 의사도 정맥 혈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정맥 혈전 예방에 아스피린이 좋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아스피린과 같은 항혈소판제는 동맥 혈전을 예방할 수 있다. 혈액 응고 인자에 의해 생긴 정맥 혈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맥 혈전증에 대한 인식이 낮다 보니 일각에서는 아예 대국민용 지침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대영 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는 “호흡곤란 증세로 병원 응급실을 찾는 환자 중에서 정맥 혈전에 의한 폐동맥 색전증인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심장마비로 사망한 환자를 부검해보면 폐동맥 색전증이 사인인 경우가 허다하다. 부검을 잘 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없다. 이처럼 정맥 혈전증은 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환자는 물론 의사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대국민용 정맥 혈전증 지침을 만들어 계몽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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