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던 전자책, 벌떡 일어섰다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7.0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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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킨들’ 시리즈 연이어 성공…불황 겪는 인쇄 매체와 출판업계에 기회

▲ 네오럭스 직원들이 전자책 누트를 이용해 책을 읽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 사의 최대 경쟁자는 누구일까? 얼핏 아디다스, 퓨마, 리복 같은 경쟁 스포츠용품업체를 떠올리기 쉽다. 마케팅 전문가는 나이키의 최대 경쟁 업체로 닌텐도를 꼽는다. 한창 밖에서 뛰어다녀야 할 청소년들이 닌텐도 게임에 열중하다 보니 운동화나 운동복 수요가 떨어지고 있다. 아이튠스라는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를 운영하는 애플컴퓨터는 음반 제조업체에게 득이 될까 해가 될까? 아이튠스 사이트에서 곡을 선택적으로 다운로드하는 것이 싸고 편하다 보니 음반 판매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애플컴퓨터는 불법 무료 다운로드가 성행하는 디지털음원시장을 유료화해 음반업체들의 새 수입원을 창출했다. 정보통신기술(ICT)과 디지털 콘텐츠 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쟁 조건과 환경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 예기치 못한 경쟁자가 나타나고 기대하지 않은 기회가 위험과 혼재되어 나타난다.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이 지난 2월 전자책(e-book) ‘킨들2’를 출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전자책은 인쇄 매체나 출판업체에게 어떤 존재일까? 전자책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의 예상처럼 종이책을 대신하게 될까, 아니면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 주장처럼 전혀 다른 정보 전달 수단이 될까? 지금까지는 전자책이 사양화 위기를 맞고 있는 인쇄 매체와 출판업체에게 위협보다는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온라인게임 라그나로크 서비스업체인 그라비티의 강윤석 대표이사(43)는 가로 14cm, 세로 18㎝ 크기 전자책(e-book)을 들고 출근길에 나선다. 자택에서 서울 마포구 상암동 소재 사무실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가량. 그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조간 신문을 읽는다. 전자책은 매일 오전 6시 와이파이(WiFi) 무선통신망으로 연결된 뉴스 서버에 접속해 조간 신문을 자동으로 다운로드한다. 6인치 화면에 나오는 6개 조간 신문 주요 기사를 훑어보다 보면 사무실에 도착한다. 강대표는 자투리 시간이 나면 전자책에 담긴 최신 경영 서적이나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 강대표가 휴대한 전자책에는 2백권이 넘는 서적이 들어 있다. 최신 서적들은 인터넷 콘텐츠몰에 접속해 다운로드한다. 책이 주는 촉감이나 독특한 향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책받침 크기의 단말기에 단행본 수백 권을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전자책은 한 번 충전하면 1주일가량 이용할 수 있다. 발광다이오드(LED)나 액정표시장치(LCD)와 달리 전자책 디스플레이는 빛의 난반사가 없고, 형광판(백라이트)이 필요 없어 오랫동안 보아도 눈의 피로가 덜하다.

강대표가 휴대한 전자책은 국내 벤처기업이 개발했다. 지금까지 전자책을 출시한 업체는 열 곳이 넘는다. 미국 아마존 킨들과 e플라이북, 프랑스 사이북(CYBOOK), 네덜란드 i렉스, 일본 소니리더가 눈에 띈다. 삼성전자는 올해 7월 파피루스라는 이름의 전자책을 출시할 예정이다. 전자책에 탑재되는 디스플레이 패널 기술은 LG디스플레이와 타이완 PVI가 주도하고 있다. 타이완 디스플레이패널제조업체 AU옵트로닉스도 전자종이 패널을 양산한다. 혁신 기술 개발보다 흉내 내기에 급급한 삼성전자도 뒤늦게 전자종이 양산 채비를 갖추기 위해 분주하다. 이와 달리 LG디스플레이는 일찌감치 전자종이 패널 기술 개발을 축적했다. LG디스플레이는 구부릴 수 있는 11.5인치 전자종이 패널을 생산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전자책 보급의 일등공신은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이다. 베조스 회장은 지난 2005년 애플과 팜 출신 엔지니어를 끌어모아 자회사 랩126을 설립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카운티 쿠퍼어티노 시에 자리 잡은 랩126은 전자책 킨들 개발에 몰두한다. 그레그 저어 팀장이 주도한 킨들 개발팀은 지난 3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두께 1.8cm, 무게 2백90g인 책받침 모양의 전자책을 개발해냈다. 2007년 11월 킨들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여섯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매진되었다. 랩126은 올해 2월 사용자 편이성을 높이고 디자인을 개선한 킨들2를 출시했다. 킨들2는 출시 2개월 만에 30만대 넘게 팔려나갔다. 연이은 킨들의 성공에 힘입어 랩126은 지난 6월10일 킨들DX2를 선보였다. 킨들DX 발표회에서는 제프 베조스 회장이 직접 신제품 소개에 나섰다. 킨들DX는 화면 크기를 9.7인치로 키웠고 해상도를 높였다. 저장 용량은 4기가바이트(GB)로 늘려 단행본 3천5백권을 저장할 수 있다.

킨들의 성공 비결은 풍부한 콘텐츠 확보

▲ 제프 베조스 아마존닷컴 회장이 킨들DX를 소개하고 있다. ⓒAP연합

사용자는 컴퓨터나 킨들 단말기로 아마존 킨들 사이트에 접속해 콘텐츠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같은 신간 서적은 10달러에 다운로드한다. 블릭하우스가 출판한 고전물은 1.99달러에 불과하다. 수많은 책이 무료로 제공된다. 신문은 달마다 5.99~14.99달러, 잡지는 1.25~3.49달러에 제공된다. 킨들은 웹브라우저와 MP3 플레이어를 탑재하고 있다. 미국 통신사 스프린트와 제휴해 ‘위스퍼넷’이라는 무료 3G무선통신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킨들은 컴퓨터와 연결해야 전자책을 구입할 수 있던 기존 사업 방식에서 탈피했다.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은 ‘킨들 사업 모델은 단말기 판매가 아니라 서비스’라고 규정한다. 애플컴퓨터 아이튠스처럼 킨들 사이트는 온라인 콘텐츠가 거래되는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아마존은 플랫폼 사업 모델을 활성화하고자 적과의 동침도 불사한다. 올해 3월 킨들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애플컴퓨터의 아이폰과 아이팟터치에 공급했다. 자사가 보유한 전자서적 콘텐츠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서이다. 뉴스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인쇄 매체와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전문서적 출판사인 와일리와 피어슨도 킨들 콘텐츠 제공 업체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존은 출판사에게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신간 서적 1권을 다운로드 서비스하고 9.99달러를 받으면서 출판사에게는 10달러 이상 지불했다. 이정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잠재성은 크지만 초기 시장 형성이 더딘 산업은 적을 최소화하고 우군을 늘리기 위한 아마존의 전략이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킨들이 성공하자 전세계 전자업체, 출판사, 통신사가 합종연횡하며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소니는 검색엔진업체 구글과 손잡았다. 구글은 전세계 디지털 저작물 50만권을 소니에게 제공했다. 애플은 통신업체 버라이존과 콘텐츠업체 사이먼앤슈스터와 제휴해 아이폰을 통해 단행본 10만권을 서비스하고 있다. 이밖에 서점 반스앤노블이 스마트폰 블랙베리로 유명한 림과 손잡고 6만편이 넘는 전자책을 유료 서비스하고 있다. 림은 전자책에 맞는 대화면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출시할 예정이다.

전자책 사업의 성패를 가름하는 결정 변수는 콘텐츠이다. 일본 소니가 지난 2006년 전자책 소니리더를 미국에서 출시했다. 하워드 스트링거 소니 회장이 콘텐츠 확보를 독려했으나 고작 1만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소니는 지난 2003년 11월 일본 출판사 고단샤, 신쵸샤, 다이닛뽄을 비롯해 15개 업체와 합작으로 퍼블리싱링크라는 업체를 설립했다. 파나소닉과 도시바 같은 전자업체도 일본 대형 출판사 72개사와 합작해 전자서적 판매 사이트를 운영했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시장 형성에 실패했다. 콘텐츠 확보에 실패하면서 채 1만대도 팔지 못하고 시장에서 철수했다. 아마존은 킨들을 출시하기 전에 콘텐츠를 충분히 확보했다. 킨들 사용자는 2007년 말 구입하자마다 단행본 8만8천권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지금 아마존 킨들 사이트에는 2008년 말 단행본 27만5천권이 올라 있다.

▲ ① 킨들DX / ② 파피루스 / ③ 네오럭스의 누트

인쇄 매체, 전자책에 유료 뉴스 제공 기대

전자책의 등장을 가장 반기는 곳은 전세계 인쇄 매체이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인쇄 매체의 광고 수입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내로라하는 매체들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LA타임스와 시카고트리뷴이 파산했다. 뉴욕타임스는 본사 건물을 담보로 2억2천5백만 달러를 대출받아 연명하고 있다. 시카고를 비롯해 일부 미국 대도시는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신문이 없는 형편이다. 이 와중에 전자책이 인쇄 매체들에게 새 수입원으로 등장했다. 광고 급감에 따른 수지 보전을 기대하기 힘들지만,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한 유료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유통 채널이 생겼다는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인쇄 매체들은 앞 다투어 킨들에게 뉴스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인쇄 매체들은 애플 아이튠스가 유료 음원시장을 창출했듯이 킨들이 유료 뉴스 콘텐츠 시장을 조성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광고디스플레이업체 네오럭스가 지난 6월8일 누트2라는 전자책을 출시했다. 실적은 저조하다. 지금까지 몇 백대를 파는 데 그쳤다. 네오럭스가 중점을 두는 것은 콘텐츠 확보이다. 네오럭스는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 출판사 2천6백개와 접촉하고 있다. 민음사 출판그룹이 가장 적극적이다. 단행본 4만권을 제공했다. 길벗, 다락원, 북21이 수천 권씩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두산동아, YBM시사영어, 한국브리태니커가 콘텐츠 제공 업체로 나서고 있다. 누트2의 강점은 와이파이 무선모뎀이 탑재되어 와이파이 중계기가 설치된 곳 주변에서는 파일 다운로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금 조선일보, 매일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 연합뉴스를 비롯해 6개 언론사와 콘텐츠 제공 계약을 체결했다. 잡지나 만화 콘텐츠 업체와도 콘텐츠 제공 협상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 전자책 시장 규모는 18억 달러였다. 2013년에는 89억 달러까지 늘어난다. 미국 회계법인이자 시장조사 기관인 프라이스워트하우스쿠퍼스는 전자책 시장이 해마다 37.2%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오랫동안 전자책은 전망만 무성했지 실체가 없었다. 마침내 종이책을 대신해 일반 대안으로 사용될 시점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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