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저래도 제약사만 산다
  • 석유선 (의학 칼럼니스트) ()
  • 승인 2009.07.01 00: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희귀·난치병 약값에 리펀드 제도 도입“정부가 기금 마련해 운용해야 최선”

▲ 서울 보건복지가족부 앞에서 건강권 보장과 의료 공공성 강화를 위한 희망연대 회원들이 희귀 의약품에 대한 리펀드 제도 도입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약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울상이던 환자들에게 최근 한 가닥 희소식이 들려왔다. 보건 당국이 외국보다 국내 공급 약가가 낮다며 공급을 거부했던 다국적 제약사를 상대로 ‘리펀드 제도’를 운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일단 약은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그동안 약값이 비싼 데다 제약사들이 공급을 거부해 이중으로 속앓이를 해야 했던 환자들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 기한은 1년으로 한정했지만 제약업계와 환자들에게 미칠 반향은 제법 커 보인다. ‘리펀드 제도’란 다국적 제약사가 국내에 공급하는 의약품 가격을 세계적인 수준(명목상 약가)에서 우선 인정해준 뒤, 건보공단이 제시하는 약값(실제 등재약가)과의 차액은 제약사가 향후 건강보험으로 환급받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렇게 되면 약값 상승에 따른 건강보험료 인상을 막고 환자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이 제도는 과거 논란이 컸던 ‘글리벡(노바티스)’을 비롯해 에이즈치료제 ‘푸제온(로슈)’, 혈우병치료제 ‘노보세븐(노보노디스크)’ 등 필수 약제에 대해 해당 제약사가 낮은 약가를 문제 삼아 공급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건강보험료 인상 막고 환자 부담 줄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는 지난 6월16일 회의를 열고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의료비 지원 사업 대상 질환에 해당하는 의약품 중 일부에 대해 리펀드 제도를 한시적으로 시범 도입키로 했다.
시행 대상은 정부의 의료비 지원 사업 대상인 1백11개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 가운데 ‘대체 약제가 없는 필수 약제’로, 복지부는 1년간 시범 적용한 뒤 영향을 분석해 확대 대상을 결정한다.

정부는 필수 약제의 ‘공급 중단’이라는 제약사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환자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제도 시행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제약사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우선 우리나라가 세계적 약가 산정에 반영되는 ‘참조 가격 국가’라는 점에서 타 국가에서 약가를 정할 때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향후 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 협상에서 명목상 가격을 내세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허권 문제로 다국적 제약사의 오리지널 약을 무조건 공급하도록 ‘강제 실시’할 수 없는 정부가 차선책으로 내세운 리펀드 제도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한 것이 아닌 임시 방편이기는 하지만 일단 약 공급 문제의 숨통은 튼 셈이다.

한시적이지만 제도가 시행되자, 보건의료 시민단체들은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다. 리펀드 제도 자체가 궁극적으로 필수 약제에 대한 안정적 공급을 보장할 수 없고, 장기적으로 제약사의 독점적 공급 권한에 끌려갈 것이라는 우려에서이다.

무엇보다 불법으로 금지한 리베이트를 궁극적으로 ‘양성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명목상 약가와 실제 약가 사이 차액을 제약사가 환급하려면 그만큼 리베이트를 통한 고가약 정책이 불가피하다는 것.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송미옥 회장은 “리펀드 제도는 사실상 제약사의 뒷돈 거래를 정부가 용인하고 제약사의 독점 가격을 보장하는 제도이다. 뒷돈 거래 특성상 약가 협상에서도 투명성을 담보하기 힘들어질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번에 결정된 1백11개 희귀·난치성 질환에 이어 백혈병이나 암 등 중증 질환 치료제에 대한 공급을 거부할 경우, 제도의 부작용이 더 커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의약품정책연구소 한오석 소장은 “이번에 희귀·난치성 질환에 한해 시범 사업을 한다지만, 다른 중증 질환에도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공급 주도권을 가진 제약사가 명목적 가격을 이유로 약 공급을 거부하면 또 다른 리펀드제가 도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우려 때문에 정부는 이번에 한시적 시행 대상으로 환자 본인 부담이 필요 없는 1백11개 질환 필수 약제만을 택해 실제 환자를 상대로 한 리펀드제 시행은 불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 필수약제 외에 환자 본인 부담이 있는 약제의 공급을 제약사가 중단한다면, 리펀드 제도 시행은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제약사가 차액 환급을 거부하게 되면 정부가 강제로 민사절차를 통해 강제 환원할 방침이지만, 실효성은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약값 본인이 부담하면 저소득층 혜택 힘들 듯

정부는 대상 약제 확대는 없다고 못박았지만, 만약 리펀드 제도가 여타 중증 질환으로 확대되어 약값의 본인 부담이 발생할 경우 리펀드(차액 환급)가 실제 가능할지부터가 의심스럽다.

특히 본인 부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장애인, 저소득층의 경우는 5~10%의 본인 부담이 생기게 되면 필요한 약이라도 부담을 꺼리게 된다.

힘들게 구입을 했더라도 자신의 부담분에 대한 차액 환급 기준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당장 약을 구입하더라도 결과적으로 환자가 약값 부담을 지게 되고 그 고통이 저소득층에게는 2배로 더 크게 다가온다. 일선의 장애인 지원센터 등에서는 이미 환자가 먼저 돈을 내고 나중에 리펀드해주는 제도는 돈이 없는 취약 계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민원이 쏟아지고 있다.

약값으로 1만원을 내고 나중에 8천원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인 저소득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는 먼저 낼 돈이 없어서 정부의 지원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것이다.

백혈병환우회 안기종 대표는 “당장 본인 부담이 없는 약제만으로 리펀드 제도를 한정한다고 하지만, 향후 본인 부담이 있는 약의 공급 문제가 불거지면 과연 정부가 어떤 방법을 내놓을지 의문스럽다. 향후 항암제로 대상이 확대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당장 약이 필요한 환자가 부담을 지고 제약사는 독점적 약가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리펀드제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건정심이 향후 1년간 시범 사업에 대한 결과를 철저히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선진국에서처럼 희귀·난치성 질환의 경우, 정부 또는 별도기관에서 기금을 마련해 운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들 필수 약제의 안정적 공급을 지원할 수 있는 별도 관리 기관이 신설되면 끝없는 약값 논란은 자연스레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방안으로 시민단체는 ‘강제 실시’를 정부가 결단력 있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관계자는 “강제 실시는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특허권을 기술 향상과 확산을 위한다는 특허 제도의 취지에 맞게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패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