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이 된 토익 9백점의 꿈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7.0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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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기 동원한 부정 응시생들 대거 적발…부당 이득 챙긴 주범은 ‘전과자’

ⓒ시사저널 박은숙


최근 발생한 토익 시험 부정 사건은 한 편의 첩보영화였다. 토익 시험은 1년에 열두 번을 치르며 지난 한 해 1백80만명이나 응시했다. 이렇듯 수많은 수험생의 이해가 걸려 있는 만큼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시험 부정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토익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적발되는 부정 행위 중 열에 아홉은 다른 응시자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메모를 해서 문제를 유출하는 정도이다. 한국토익위원회(이하 토익위원회)에 설치된 사이버신고센터에는 월평균 2~3건의 제보가 들어오지만 대부분 단순 커닝이다. 이번처럼 첨단 장비가 동원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는 지금까지 딱 두 번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번 모두 주범이 같다. 주범 김 아무개씨(42)는 이미 토익위원회의 블랙리스트 1번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김씨는 ‘토익 부정 행위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고 있으며, 토익에서 첨단 장비를 동원한 시험 부정 사건을 최초로 일으키기도 했다. 토익위원회와 김씨는 수년째 창과 방패가 되어 숨 막히는 대결을 펼쳐왔다.

양측의 악연은 지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26일 실시된 제158회 토익 시험에서 최대의 부정 사건이 터졌다. 첨단 기기가 이용된 조직적인 사건이었지만 위원회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당일 시험이 끝난 뒤 수험생들 사이에는 ‘부정이 있었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한 수험생이 언론사에 제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초소형 무전기와 휴대전화 동원…역할 분담해 조직적 범행

당시 경찰에 적발된 부정 행위 수법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초소형 무전기와 휴대전화가 동원되었고, 각자 역할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범행이 이루어졌다. 먼저 영어에 능통한 ‘선수’가 수험생으로 가장해 시험장에 들어가서 문제를 풀었다. 선수는 이 문제의 정답을 시험장 주변에 대기 중인 ‘전파선’에 보내고, ‘전파선’이 이를 받아 수험생들에게 전송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시험 2~3일 전에 예행 연습까지 했다. 회사원 박 아무개씨 등 수험생 17명은 1인당 3백만~4백만원을 주고 부정 행위에 가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의 주범이 김씨였다.

부정 행위를 사전에 막지 못한 토익위원회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수험생들의 원성이 빗발쳤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 토익위원회는 사이버신고센터를 설치하고, 경찰청 사이버범죄 수사대에서 일한 베테랑 수사관을 영입하며 ‘부정 행위 근절’에 나섰다. 부정 행위자를 신고할 경우 최고 1천만원을 주겠다며 포상금까지 내걸었다. 그렇다고 시험 부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그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김씨는 교도소에 수감되고 나서도 ‘토익 부정 시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토익 시험의 비중은 날로 커지고 점수를 따려는 수험생은 얼마든지 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이보다 손쉬운 돈벌이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씨에게 교도소는 부정 행위를 모의하고 연구하는 ‘범죄 도서관’이나 다름없었다. 김씨는 교도소 안에서 시험 부정을 공모할 ‘선수’를 물색했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것이 박 아무개씨(31)였다. 박씨는 27년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영어에 능통했고, 영어강사를 하며 인터넷으로 영어 과외를 해오는 등 ‘선수’로서 최적임자였다. 당시 박씨는 마약 및 업무방해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어서 수감 기간도 길지 않았다. 박씨에게 접근한 김씨는 토익 부정 시험을 함께 시도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동의한 박씨에게 자신의 범죄 노하우를 전수시켰다.

김씨와 박씨가 출소한 후 본격적으로 창과 방패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이버신고센터를 설치한 후 5~6명의 직원을 상주시키고 있던 토익위원회는 2중 3중의 방어막을 쳤다. 여기에 맞선 김씨의 수법도 더욱 첨단화되고 지능화되었다. 고성능 첨단 장비가 동원되었다. 지난 2006년 당시에는 초소형 무전기와 휴대전화를 이용했다면 이번에는 무전기에 목걸이형 안테나가 부착된 자기장 무선 이어폰, 자체 제작한 목걸이형 안테나, 답안 송수신용 무전기, 귓속에 장착할 수 있는 고성능 이어폰이 사용되었다.

김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대포폰을 이용했다. 수험생들과 통화할 때는 발신번호 제한으로 연락하고, 한 번 사용한 휴대전화는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노숙자의 인적사항을 이용해 가입했으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곳의 PC방을 돌아다니며 사용하는 등 빈틈없이 준비했다.

부정 행위 방지 시스템에 허점…사후 신고 없었으면 완전 범죄 될 뻔

수험생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모집했다. 영어 관련 카페에 ‘토익 9백점 보장’ 등의 글을 올려 미끼를 던져놓고,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기고 만나자는 e메일을 보냈다. 상담 과정은 엄청 까다로웠다. 수험생의 토익 점수, 직업은 물론이고 가족 중에 경찰이 있는지 등을 철저하게 따졌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부정 행위에 끌어들였다. 시험 2~3일 전에 다시 면담하고 부정 행위 방법, 준비 사항까지 챙겼다. ‘시장에 가서 긴 소매 남방을 사서 준비해라’ ‘왼쪽 소매 부분을 3.5~4cm 절단해라’ 등을 알려주었다.

정답을 밖으로 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수 역할을 맡았던 박씨는 차량 리모컨 크기의 무전기를 몰래 시험장으로 반입한 후 시험 문제를 풀면서 수시로 밖에 있는 김씨에게 알려주었다. 무전기 차임벨을 이용해서 사전에 약속된 신호로 보내면 그만이었다. 예를 들어 A번은 1회, B번은 2회, C번은 3회 하는 식이었다. 시험장 근처의 승용차 안에서 대기하던 김씨는 같은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에게는 전파 무전기를, 다른 고사장 수험생에게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답을 전송했다.

수험생들은 휴대전화를 손목에 부착하고 긴 소매 옷으로 가리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미리 옷 일부를 잘라낸 덕에 답을 몰래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수험생은 멀쩡한 팔에 깁스를 한 뒤 그 속에 휴대전화를 숨겼으며, 깁스 위에 작은 구멍을 뚫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한 수험생은 특별히 개조한 목걸이형 안테나를 목에 두르고 쉽게 보이지 않는 고성능 이어폰을 통해 답안을 듣기까지 했다. 

정답이 일치하면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시험문제 191~200번은 각자 풀기로 사전에 약속해서 부정 응시자 간에 같은 답이 나오지 않도록 했다. 토익 시험 제194~197차까지 4회에 걸쳐 부정이 이루어졌으며, 수험생 30여 명이 여기에 가담했다. 김씨는 이 중 28명에게서 1인당 2백만~3백만원씩을 받아 약 5천만원 상당의 부당 이익을 챙겼다.

토익위원회가 부정 행위에 대해 안 것은 196차 시험이 끝난 지난 5월11일이었다. 사이버신고센터를 통해 제보가 들어왔다. 토익위원회는 부정 응시자의 토익 응시 기록, 신상 정보 등을 샅샅이 찾아 5월28일 경찰에 관련 내용을 넘겼다. 만약 신고가 없었다면 완전 범죄가 될 가능성이 컸다. 이 때문에 토익위원회가 베테랑 수사관을 영입하고 신고센터를 운영했음에도 방어 시스템에 허점을 보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이번 사건에 연루된 수험생들은 평소 토익 점수가 약 5백점대였으나 단숨에 9백점대로 치솟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9백점 환상’은 악몽이 되었다. 이번 점수는 무효 처리되고 향후 5년간 토익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전과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한국토익위원회 한재오 이사는 “토익 시험의 모든 부정 행위는 사전·사후 토익 시험 부정 행위 특별 시스템에 의해 모두 적발되고 있다. 향후 선의의 피해 수험자가 발생되지 않도록 모든 관리 시스템을 보완하고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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