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 ‘죽은 자’ 신음하는 평택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07.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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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파업 현장 취재 / 어제의 이웃·친구가 적으로 돌변…노-노 갈등 막바지로 치달아

▲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 해고로 점거 파업 48일째를 맞은 지난 7월8일 오전, 한 노조원의 아내가 공장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만나고 있는 가운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어머니가 아들에게 인연을 끊자고 하고, 고향 선배가 후배에게 육두문자가 섞인 메시지를 보내고, 매제가 처남의 파업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에 나간다. ‘산 자’와 ‘죽은 자’로 처한 입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쌍용자동차가 총파업에 들어간 지 50일을 넘어서면서 상처의 깊이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곪아가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은 지난 7월8일,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을 찾았다. 공장은 직장 폐쇄 상태였기 때문에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그날은 운 좋게 출입할 수 있었다.

파업을 벌인 지 48일이 지나서 그런지 노조원들의 표정은 다소 지쳐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해고와 비해고라는 엇갈린 명암 속에서 가족 또는 친척과 관계가 틀어져 힘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처 난 가슴을 또다시 손가락으로 헤집어 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쩔쩔매는 기자에게 김성광씨(가명·38)가 다가왔다. 그는 “할 말이 있다”라며 나무 그늘 아래로 기자를 이끌었다.

김씨는 “처음으로 노-노끼리 충돌했던 지난 6월15일, 차마 앞을 쳐다볼 수 없었다. 회사가 동원한 집회 인파 속에서 매제를 볼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씨와 그의 매제는 창원지부에서 엔진 가공과 보전 업무를 맡아 7년간 일했다. 사는 곳도 비슷해 출퇴근도 같이하고 식사도 같이하는 날이 많았다. 쌍용자동차 노조가 총파업을 선언하던 5월21일, 매제와 행보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김씨는 총파업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지만 매제는 짐을 싸지 않았다. 김씨는 죽은 자였고 매제는 산 자였기 때문이다(김씨는 해고자를 ‘죽은 자’, 비해고자를 ‘산 자’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관제 집회’가 열리던 날, 아침 일찍 여동생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했는데 역시나 나갔다고 하더라. 늦지 않게 새벽 4시 반에 서둘러 나갔다는 말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동생에게 ‘인연을 끊자’라는 말을 쏘아붙이고 전화를 끊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질지 못했던 김씨는 집회 대열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매제를 눈앞에서 보게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현장에서 매제와 마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날 저녁 인터넷 뉴스에 올라온 사진에서 매제 얼굴을 발견했다. 김씨는 “씁쓸합디다. 그래도 가족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이때까지만 해도 매제를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 처음이니까 한 번 정도는 회사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 있다며 애써 심란한 기분을 정리했다.

“사측에 동원된 매제 볼까 두려웠다”

▲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에서 비해고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의 가족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하지만 노-노 간의 유혈 충돌이 있었던 6월26일에도 매제가 평택 공장으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고 한다. 김씨는 “아무리 먹고사는 것이 급해도 가족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데 사측에 서서 ‘파업 철회’를 외치는 것이 서로 할 짓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아내와 여동생의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아내가 우울증 초기 증세까지 보이고 있어 김씨는 쇳덩이가 누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갑갑하다고 했다.

김씨는 어머니의 상황도 좋지 않다고 했다. 뇌경색 증세가 있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함에도 아들, 딸 걱정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그저 아들의 건강이 걱정되어 매일 하루에 한 통씩 전화를 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 김씨에게는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 2월,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추간판막파열’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도 회사에 짐이 될까 봐 산재보험 처리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회사만 생각하고 일만 했는데 그런 회사가 나에게서 직장도, 가족의 건강도, 화목도 빼앗아갔다”라며 씁쓸해했다. 1시간 넘게 사연을 털어놓고 일어서는 그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압박 붕대가 눈에 들어왔다.

도장 공장으로 향했다. 노조원이 다섯 명 정도 모여 있는 곳에 가서 해고와 비해고의 차이로 가족끼리 등을 돌린 사연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노조원은 “쌍용자동차는 징검다리 채용이라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서로를 소개해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다. 노-노 갈등으로 유혈 충돌이 있었던 6월26일, 형제가 사측과 노조측으로 나뉘어 전면전에서 부딪힌 적도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이때 박성민씨(가명·36)가 입을 열었다. 이종사촌과 10년 동안 함께 회사를 다녔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월급이 절반 정도 깎여 나온 후 같이 아르바이트도 다니면서 회사의 문제를 공유했다. 그러다 6월 이종사촌은 살고, 나는 죽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이종사촌은 걱정되는 마음에 ‘몸 조심해라, 파업 철회하고 나와라’라고 말하는데 협박 전화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런 박씨에게 1주일 전, 아내가 울면서 전화를 해 왔다고 한다. 이종사촌이 박씨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진행될 것이다. 가압류가 들어갈 것이다. 빨리 형을 설득하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잔뜩 겁을 먹은 아내는 남편에게 “제발 나오라”라고 소리쳤다. 박씨는 “이종사촌은 벌써 회사 교육에 세뇌를 당해서 자신이 한 말이 해고자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조차 모른다. 그냥 한마디 충고로 내뱉는 말이지만 벼랑 끝에 선 우리에게는 칼이 되어 돌아온다”라며 치를 떨었다. 박씨는 파업이 어떻게 정리되든 말든 당분간은 이종사촌과 연락을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큼 가족이, 친척이 주는 상처는 타인이 주는 상처보다 깊었다.

ⓒ시사저널 임영무

피를 섞은 가족이나 친척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피를 나눴다고 할 만큼 절친한 동료가 적으로 돌아서 이간질을 부추기는 행태는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와 배신감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듯했다. 노동조합 사무실 앞 휴게 공간에서 만난 장성민씨(가명)는 “논산에 살고 있던 어머니가 최근 평택까지 올라와 공장 앞 도로에 드러누웠다. 어머니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아예 나가지 않았다. 동료들한테 들어보니 바닥에 드러누워서 ‘파업 그만하고 나오라’라고 소리 지르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렇게 눈이 뒤집힌 것은 ‘아들 감방가게 생겼으니 설득하라’라는 조과장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였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파업 노동자 어머니에게 협박 전화도 걸어

장씨와 조과장은 14년 지기 직장 동료였다. 기술자와 관리자 관계였지만 지난해 여름휴가도 같이 다녀올 만큼 편한 사이였다. 해고자 명단이 나온 뒤 조과장에게 해고자는, 처리해야 하는 ‘죽은 자’에 지나지 않았다. 조과장은 장씨가 어머니에게 약하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어머니를 이용했다.

장씨는 “얼마나 겁을 먹게 만들었으면 노인네가 한걸음에 달려왔을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파업이 제대로 처리되고 안 되고를 떠나 공장문을 나서는 순간 조과장을 찾아서 침을 뱉어줄 것이다”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노조 지도부인 장씨는 강인해 보였지만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장씨 옆에 있던 문성호씨(가명·42)는 기자에게 문자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육두문자가 가득 섞여 있는 문자메시지였다. 고향 선배이자 직장 선배인 양 아무개씨가 보낸 것이라고 했다. 문씨는 “노-노 간 유혈 충돌이 있었던 6월26일, 양씨에게서 전화가 두 통 왔다. 부담스러워 받지 않았다. 6월29일, 비아냥거리는 문자가 왔다. 다음 날, 또다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욕으로만 가득 찬 문자가 날아왔다. 모욕감과 모멸감에 잠도 안 오더라. 결국 7월1일, 통화를 했는데 한다는 말이 ‘자기 머리를 향해 볼트 새총을 겨눈 사람이 누구냐’라는 것이었다. 그냥 전화를 끊었다”라며 몸서리를 쳤다.

양씨처럼 ‘살아남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쌍용자동차 직원들이 많이 사는 평택 세교동 아파트 단지에서 쌍용자동차 직원의 부인을 만났다.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윤미나씨(가명·38)는 “남편은 해고당한 동료들에게 전화를 할 때면 꼭 술을 마셨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전화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남편 동료 아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길가다 볼까 무섭다. 최근에 가까이는 아니지만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더라. 죄인이 된 기분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평택시 지산동 편의점에서 만난 임지숙씨(가명·35)는 지난 1월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했다. 쌍용자동차에 다니는 남편의 월급이 반 토막 나고 어떤 때는 아예 나오지 않는 달이 생겨나면서부터이다.
지난 5월, 남편이 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불안하다. 임씨는 “차라리 남편이 해고되었으면 다른 일자리라도 찾아볼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냥 집에서 쉰다. 대리운전이나 공사판 아르바이트 자리는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이미 희망퇴직자들이 이런 일자리는 모조리 꿰찼다. 내가 한 달에 벌어가는 30여 만원이 수입의 전부이다”라며 생활고를 털어놨다. 이런 생활이 7개월째 접어들자 한계에 다다랐다고 했다. 임씨는 “세 아이가 다니던 학원을 다 끊고도 마이너스 통장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여기서 더 가면 이혼하자는 말이 터져 나올 지경이다. 어떻게든 가족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회사가 정상화되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라고 하소연했다.

지역 사회도 고통 속에서 신음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직원들의 지출은 지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장 직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통에 지역 상권도 무너지고 있다.

평택시 지산동에 사는 최수지씨(가명)는 “최근에는 술집에서 쌍용자동차 직원들이 회식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택의 경제가 내려앉을 판이다. 정부가 나서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지 다 죽게 생겼다”라며 울상을 지었다. 쌍용자동차 사태로 평택 지역 주민 42만명 모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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