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성 ‘공감’, 시기·형태엔‘갑론을박’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7.1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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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가 바라보는 개헌론 / 불안정한 정치 상황 탓 신중론 많아 공론화 주체에 대해서도 의견 분분

▲ 7월9일 열린 국회미래한국헌법연구회 창립 1주년 기념 ‘대통령제, 어떻게 할것인가?’ 토론회에 참석한 전 국회의장들. ⓒ시사저널 유장훈

2007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른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가 정치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인 지난해 9월, 당시 한국정치학회 이정희 회장(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일행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맞았다. 지난해 정치학회는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연쇄 인터뷰를 학회 소식지에 싣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노 전 대통령을 찾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이회장은 ‘개헌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노 전 대통령의 답변은 “그것은 물 건너간 것 아닙니까”였다. 개헌을 체념한 듯했던 이 발언은 학회 소식지에 실리지 않았다.

그렇게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던 개헌 논의가 지금 다시 정치권에서 활발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그 동력이 더 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국회의원 1백86명이 소속된 연구단체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 주최로 지난 7월9일에는 ‘역대 국회의장 초청 개헌 좌담회’가, 10일에는 ‘국회의원 개헌 토론회’가 잇따라 국회에서 열렸다. 소위 정치권의 ‘분위기 띄우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셈이다. <시사저널>이 이번에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이 필요하다’라고 답한 이가 62.1%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학계에서 바라보는 개헌론에 대한 시선은 상당히 신중한 모습이다. 즉답을 피하는 학자도 많았다. 손동권 한국형사법학회 회장(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헌법학 교수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쪽에 물어보는 것이 낫다. 나는 아직 그 문제를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권 흐름에 맞물리면서 학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개헌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학계 전문가 역시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한국헌법학회장인 김승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헌 필요성은 있다. 다만,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우선 국민 대다수가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해야 한다. 또 하나는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상황은 의회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정하다.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대통령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신평 전 헌법학회장(경북대 법학 교수)은 개헌론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그는 “현행 헌법 가지고 국정의 모든 면을 끌어갈 수 있겠느냐. 전문가들도 인식을 전환해서, 헌법의 구문(舊文)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현행 헌법이 불충분한 점이 많으니까, 개헌을 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 (맨 왼쪽부터)김승환 한국헌법학회장, 신평 전 한국헌법학회장, 이남영 한국정치학회장, 이정희 전 한국정치학회장.

여야 대치 국면과 쌓인 현안 문제도 논의 진척 막아

이처럼 개헌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한국정치학회장인 이남영 세종대 정책과학대학원장은 “개헌의 필요성은 분명히 인정하지만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닌 것 같다. 현재 여야 관계도 그렇고, 현안 문제도 쌓여 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빠르다. 개헌 문제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 논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현 시점에서 개헌 문제를 자칫 잘못 얘기했다가는 오히려 안 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정희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대통령제의 불합리한 측면이 더 부각되면서 시류를 타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단체에서 활발하게 개헌 논의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며 계속되어야 한다. 다만, 국민들이 개헌 필요성에 대해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6월26일 한국공법학회 회장으로 취임한 박균성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부 공법학회 회원들은 개헌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면 공법학회에서도 자체 개헌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에 학회에서도 정파를 떠나 개헌 논의를 할 계획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개헌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내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지의 국민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하는 셈이다. 신평 전 회장은 “개헌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내년 3월까지 완료해서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하면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방선거 이후 정권 말기로 넘어가면서 또다시 실기(失期)하게 된다”라고 주장했다. 김승환 회장은 “현재는 한나라당이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가기 때문에 지금의 의회가 개헌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하지만 내년 지방선거 이후에 만약 현 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오게 되면 한나라당 내부에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해질 것이고, 그러면 의회가 제 모습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아무리 빨라도 내년 지방선거 이후에나 개헌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우리나라 실정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정부 권력 구조 형태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쪽으로 많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면서도 차기 권력 구조 형태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는 편이었다. 다만, 김승환 회장은 “4년 중임 대통령제이면서도 정·부통령제를 병합하는 형태가 안정적이다”라고 미국식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신평 전 회장은 권력 구조 형태를 선택할 때, 점수를 매겨서 계량화하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통일 이후 체제에 어느 권력 구조 형태가 더 적합하며, 국민 통합 측면에서는 어느 형태가 더 적절한지 등을 하나하나 점수를 매겨서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남영 회장은 “권력 구조 형태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다. 북핵 위협이라든지 국가 위기가 계속된다면 현행 5년 단임제든 4년 중임제든 책임 있게 국정을 이끌어갈 대통령제가 적합하다. 하지만 국가가 안정기에 접어든다면 내각책임제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개헌 공론화의 주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김승환 회장은 “대통령보다는 국회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반면, 신평 교수는 “개헌 문제의 속성상 국회가 주체가 되는 것이 맞지만, 우리 정치의 현실 여건을 보면 정부가 추진하는 것이 맞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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