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거리에 출몰하는 ‘스탈린 망령’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7.2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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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 독립 요구한 인사들 암살 계속돼‘푸틴 사람’ 카디로프 대통령에게 혐의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 ⓒAP

나탈리아 에스테미로바의 시신을 옮기는 백색 미니밴이 7월16일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 거리를 천천히 가고 있었다. 애도하는 군중이 뒤를 따랐다. 주로 여성들이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의 뺨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중 한 사람이 든 피켓에는 손으로 쓴 구호가 적혀 있었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운구차는 멀리 가지 못했다. 2백m쯤 갔을 때 사복 경찰이 나타났다. 상여 시위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못 하느냐고 누군가 항의했으나 경찰은 들은 척도 않고 행렬을 해산시켰다.

10대의 딸과 함께 사는 독신녀 에스테미로바(50)는 인권운동가였다. 그녀를 지원하는 인권 단체 ‘미모리얼’(Memorial)은 체첸 대통령 라즈만 카디로프가 그녀를 죽였다고 비난했다.

크렘린의 강력한 비호를 받는 카디로프는 체첸의 독립을 요구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잔혹하게 탄압한다. 암살, 납치, 실종, 고문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의 인권 탄압 수법이 워낙 스탈린을 닮아 ‘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에스테미로바는 지난 10년간 그의  만행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

7월15일 아파트를 나서던 그녀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붙잡혀 자동차 트렁크에 실렸다. 8시간 후 총상을 입은 그녀의 시신이 고속도로 길가에서 발견되었다. 카디로프에게 에스테미로바는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다. 그녀가 암살되기 며칠 전 체첸 정부의 고위 인사가 그녀를 불러 경고했다. “윗분께서 당신의 보도에 매우 불편해한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죽음을 알리는 메시지이다. 이런 경고를 받은 반체제 인사들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직접적인 사건은 반군에게 양 한 마리를 준 혐의로 공개 처형된 한 남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러나 반드시 이 때문에 그녀가 희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녀의 모든 인권 활동이 권력의 비위를 건드렸으니 어차피 올 것이 온 것이다. 체첸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인사들은 차례차례 사라진다.   

체첸 사태 보도하다 피살된 기자도 12명

소련 붕괴 이후 체첸을 휩쓸었던 내전은 공식적으로는 끝났다. 수도 그로즈니는 재건되었고 상가와 카페들은 다시 문을 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하다. 그러나 에스테미로바의 죽음은 체첸이 암살과 납치와 실종이 자행되는 암흑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이다. 원인 모를 실종, 길가에서의 갑작스런 납치, 한밤중 침대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자동차에서 갑자기 끌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상이 되어 간다.

미모리얼에 따르면 금년 6개월 동안 일어난 실종 사건은 74건이다. 지난해의 42건보다 거의 두 배 늘었다. 실종된 사람들의 다수는 시간이 흐른 후 어디선가 시체로 발견되거나 영원히 소식이 없다.

2년 전 러시아의 실질적인 강자 블라디미르 푸틴에 의해 대통령에 간택된 카디로프는 ‘살인 면허’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누구든 제거한다. 의문의 암살이나 실종 사건이 단 한 건도 규명되거나 책임자가 처벌된 일이 없다.

“러시아에서 자신의 생명을 단축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크렘린 당국이 감추려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된다.”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잇따르는 반체제 인사 암살 사건을 이렇게 풍자했다. 암살은 주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체첸에서 일어난다. 반인륜적 탄압을 보도하거나 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와 인권운동가들이 주로 희생물이 된다.

누가 이들을 죽였는지는 영구 미제로 남아 있고 이 사건의 진상이 가까운 장래에 밝혀질 전망은 거의 없다. 요즘 러시아에서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 살인 행위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무법 문화’가 꽃피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체첸 희생자를 변호하던 인권 변호사가 크렘린궁 인근에서 피살되었다. 그와 동행한 기자도 함께 죽었다. 2006년에는 체첸의 인권 유린 사태를 취재하던 기자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암살되었다. 2003년에는 크렘린의 독재를 비판하던 국회의원이 모스크바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2004년에는 모스크바 석유 재벌의 부패를 취재하던 미국 경제 잡지 <포브스>의 러시아인 편집자가 모스크바 거리에서 암살되었다. 서방이 이를 문제 삼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즉각 내정 간섭이라고 항의했다. 체첸 사태를 보도하다가 피살된 기자는 12명이나 된다.

지난 6년간 러시아에서 암살된 반체제 인사는 거의 20명에 달한다. 러시아 당국은 범인을 처벌한 의사가 없다. 범인에게는 처음부터 면책의 은전이 약속되어 있다. 러시아가 개혁 개방을 통해 민주주의를 표방해도 서구 기준의 문명국가 리스트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상황은 러시아에는 치욕이다. 또한, 그 지도자들에게는 살인자라는 불명예를 안겨준다.

소련이 망한 지 20년이 되었으나 정의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푸틴이 만드는 새로운 러시아의 진로가 아리송하다. 서방식 개방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옛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것 같기도 하다. 

▲ 7월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권운동가 에스테미로바의 추도 집회 장소에 그녀(왼쪽)와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오른쪽)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EPA

‘살인자’ 불명예에도 러시아 당국은 침묵

러시아 관리들은 스탈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밤은 크리스마스 네온처럼 휘황찬란하다. 하지만 네온 불빛 뒤에는 소련 시절의 경찰 국가 잔재가 남아 있다. 일부 국민은 그 시절의 향수에 젖기도 한다.  

고유가로 돈을 번 러시아인들은 국가의 정치적 방향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나라의 종착역에 대한 인식이 없다.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가?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인가?”라는 탄식이 더러 들리지만, 러시아를 옛 소련 차원으로 부활하려는 푸틴의 야망에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 

러시아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치부를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미국발 금융 위기를 보면서 민주주의를 조롱하기도 한다. 러시아인들은 1990년대 만개했던 민주주의 시대의 나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때는 광풍의 시대였다. 정부는 술 취한 대통령에 의해 비틀거렸고, 그 대통령의 측근들은 부패의 꿀맛에 취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향유할 준비가 되지 않은 러시아를 오염시키고 파괴했다. 그래서 푸틴이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다만, 그가 선택한 방식이 스탈린식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러시아 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는 스탈린의 무덤 앞에서 이 독재자가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때는 늦은 것 같다. 푸틴으로 환생한 스탈린이 이미 러시아를 휘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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