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긴 가루매 마을의 힘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7.2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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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찾기 나선 임종상 후손 상대 승소

▲ 친일파 후손에게 소송당한 후 가루매 마을 주민들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사저널 임영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마을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주어 재판에서 이겼다. 고향 분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린다.” 지난 7월17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옥현2리 가루매 마을 출신 정병기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근에 열린 ‘친일파 후손 재산 찾기’ 1심 선고 공판에서 “마을 주민들이 승소했다”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시사저널>은 지난해 8월5일자(제980호)에 친일파 후손과 소송 중인 가루매 마을의 이야기를 보도한 바 있다. 이후 신문과 방송 등 여러 언론 매체에서도 적극적으로 다뤘다.

가루매 마을은 지난해 2월 친일파 임종상의 후손 김 아무개씨(여·68)가 단국대학교와 주민 33명을 상대로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 등의 소송을 제기하자 법정 다툼을 치열하게 벌여왔다. 임종상의 처조카 며느리인 김씨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과 논밭 등 약 1만9천4백66㎡(5천8백여 평)를 모두 내놓으라며 소송을 걸었다. 이때부터 평화롭고 조용한 시골 마을은 초상집 분위기로 바뀌었다.

▲ 서울중앙지법 판결문.

주민들, 1년 5개월 동안 피말리는 고통 속에서 신음

지난해 7월 <시사저널> 취재진이 가루매 마을을 찾았을 때 주민들은 소송 서류를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옥현2리 새마을지도자 이종진씨는 “선량하게 살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마른 날 날벼락이 쳤다. 내 돈 주고 산 내 땅이다. 그런데 친일파 후손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내쫓겠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힌 현실이다”라며 분개했었다.

친일파 임종상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일제 때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어 일본 황실에 거액의 헌금을 내는 등 반민족적 행적을 보였던 인물이다. 광복 이후에도 임종상은 친일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 지키기에 급급했다. 광복 이후 토지 개혁이 실시되자 단국대에 기부할 것처럼 하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기부 약속을 백지화했다. 이에 단국대는 ‘소유권 이전 등기 절차 이행 청구 소송’을 냈고, 임씨가 단국대에 재산을 기부한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화해 계약’을 체결했으나 후손들이 나서면서 소송을 남발했다. 지난 2005년에는 임종상의 손자 임 아무개씨가 옥현2리 주민 네 명을 상대로 소유권 이전 소송을 벌였다가 패소했다. 그런데도 조카며느리 김씨는 ‘단국대에 재산을 기부한 행위 자체가 원인 무효’라며 소유권 이전을 주장한 것이다. 

가루매 마을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임종상에게 착취당하고 광복 후에는 그 후손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등 불행한 역사가 계속되었다. 옥현2리 주민들에 따르면 주민들은 대대로 임씨 일가의 소작농으로 살아왔다. 토지의 소유권이 단국대로 넘어간 후인 1966년에야 비로소 개인들이 토지를 매입해서 개인 명의의 땅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주민들 중에는 임종상으로부터 땅을 매입하고도 증명서가 없어 두 번 세 번 매입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옥현2리 주민들은 그동안 정신적·육체적인 고통 외에 재산상의 손실도 컸다. 소송을 당한 33명의 주민들 중 16명은 각각 1천6백만원씩 갹출해서 소송비를 마련했다. 돈이 없어 대응하지 못한 주민들도 있다. 한창 농번기에는 농사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울 서초동 법원을 빈번하게 오가야 했다. 그동안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다행히 지난 7월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원고 패소 결정이 내려지면서 주민들의 마음고생은 덜게 생겼다. 정병기씨는 “임종상의 후손들이 항소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전례로 볼 때 1심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뒤늦게나마 마을에 평온이 찾아와서 기쁘게 생각한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고 있어서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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