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몰린 박근혜의 ‘승부수’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7.2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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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이종현

미디어 관련법이 강행 처리되기 직전 박 전 대표의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한나라당은 쑥대밭이 되고, 당 지도부가 혼비백산했다. 박 전 대표의 강경 행보에 대해 친박계 결속을 다지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우세한 가운데, 박 전 대표가 앞으로 사안별로 이대통령과 다른 독자 행보를 보이거나 더한 경우 정면 대결 사태로 치달을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1인자와 2인자의 차이는 서열도 아니고, 주종 관계 또한 아니다. 본질은 역할의 대등한 분담이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애널리스트가 최근에 펴낸 <1인자를 만든 2인자들>에는 ‘2인자’의 처세술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최근 들어 ‘2인자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2인자는 흔히 두 가지 역할 개념으로 분류된다. ‘참모’형과  ‘경쟁자’형이 그것이다. 참모형은 1인자에 복종하며 조언하는 최측근 성격을 지닌다. 경쟁자형은 1인자의 지위를 넘보는 라이벌을 말한다. 

한국 정치 권력사에서 2인자의 상징적인 인물로는 김종필(JP) 전 총리가 꼽힌다. 그는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박정희 정권과 김영삼 정권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를 지낸 영원한 ‘2인자’였다. 하지만 끝내 최고 권력자에 오르지는 못했다. 경쟁자형의 길보다는 참모형 처신에 더 주력한 결과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현 정권의 ‘2인자’로 불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사촌형부인 JP와는 다른 길을 가면서 정국 격랑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경쟁자’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참모형 2인자로 불리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도 항상 반목한다.

중요한 순간에 ‘결정권’을 행사하는 ‘캐스팅보트’는 2인자의 몫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때 캐스팅보트를 쥐고 흔들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양김(兩金)씨 사이에서도 한 번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또 한 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힘을 실으면서 2인자의 지위에 안주하는 데 그쳤다.

지금 정국의 캐스팅보트 역시 엄연히 박 전 대표가 쥐고 있다. 현 18대 국회에서 여당인 한나라당 의석은 약 1백70석에 육박한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은 84석이다. 한나라당이 과반을 훌쩍 넘기 때문에 캐스팅보트가 따로 필요 없는 구도이다. 그러나 여당 내에 또 다른 독자 세력인 ‘친박(친박근혜)계’를 감안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충 한나라당 내 친박계 의원 숫자는 약 50~60명 정도로 분류된다. 친박계를 제외한 한나라당이 과반에 훨씬 못 미치는 약 1백10~1백20석임을 감안할 때, 친박계의 힘은 자명해진다. 

이번 미디어 관련법 강행 처리 정국에서 이런 박 전 대표의 힘은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기세등등하던 한나라당은 박 전 대표의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쑥대밭이 되고, 당 지도부가 혼비백산했다. 민주당은 박 전 대표의 한마디에 활기를 띠었다. 상대적으로 일찍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었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18석에 불과한 소수 정당의 한계를 곱씹으며 소외당했다. 이총재는 한나라당에 대해 ‘콩가루 집안’이라는 격렬한 표현까지 써가며 울분을 토하는 데 그쳤다.

친박계, 결속력 강화 효과에도 “너무 나갔다” 우려하기도

▲ 박근혜 전 대표가 5월16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입국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하지만 역시 2인자가 가질 수 있는 분명한 운신의 폭이 있었다. 대통령과 경쟁적 관계라 하더라도 ‘동반적 경쟁자’일 뿐이었다. 결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최소한 지금은 그랬다. 노태우 정권의 YS, YS 정권의 이총재가 경쟁자형 2인자였지만, 이들도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행보를 거듭했다. 박 전 대표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국의 긴장 상태를 최고조에 올려놓은 채 결국은 1인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을 했다. 민주당은 “치고 빠지는 저열한 수법을 드러냈다”라고 맹비난했다.   

친박계 입장에서 보면 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는 “지금은 절대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간단히 현 상황을 정리한다. 박 전 대표가 ‘반대표’ 발언을 했을 때 홍사덕 의원 등 중진급에서 “너무 나갔다”라고 우려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계파 내의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일부 강경파가 박 전 대표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친박계 내부 강·온파 간의 미묘한 갈등이 드러났다.

중진 온건파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한 소장파 의원은 당시의 상황을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7월19일까지만 해도 기자들 중에 한나라당 미디어 관련법안을 제대로 알고 있은 이가 있었나.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국민도 모를 테고. 심지어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제대로 몰랐으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런데 그런 안을 직권상정으로 단독 처리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것도 안상수 원내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도 본회의에 참석한다더라’라는 확인도 안 된 말을 하지 않았나. 휴일인데도 기자들 문의가 빗발쳤다. ‘진짜 박 전 대표가 본회의에 참석하는 것인가’ ‘본회의에서 미디어법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인가’라고. 박 전 대표가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친이계 쪽에서 친박계의 분열을 먼저 유도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친박계 쪽에서 갖는 경계심은 대단하다. 친이계가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통령의 ‘8월 정국 구상’이 한창 입소문을 탈 무렵인 7월 초, 친박계의 한 핵심 의원은 사석에서 “너무 눈에 보이는 꼼수를 부려 기분 나쁘다. 아마추어가 아니라면 지금 (청와대에서) 나오는 ‘충청 총리론’이니, ‘한·자 연대론’이니, 또 ‘9월 조기 전대론’이니 하는 것이 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뻔히 안다”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당내 화합만 이룬다면 과반수가 훨씬 넘는 거대 여당으로서 국정 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다분히 선진당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친박계 고사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박계를 영남권에 고립시켜 묶어두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실제 야권 출신의 한 정치평론가는 “친이계가 충청권을 확보해서 수도권과 영남권을 묶는 벨트를 형성하면, 대세는 주류가 쥐게 된다. 힘에 민감한 여당 정치인들은 자연스럽게 힘 있는 쪽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색채가 옅은 친박계 성향의 의원들을 분산시킬 수도 있다. 친이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정권이 후반기로 갈수록 이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중되면서 쏠림 현상이 점점 ‘차기’로 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반(反)친박’ 연대 전선이라도 펼쳐야 하는 것이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여권은 8월의 정국 대전환을 준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8·15를 기해서 분위기가 바뀔 것이라는 전언이다. 청와대 개편과 내각 개편을 마치면 9월은 한나라당 순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9월 조기 전당대회설이 그것이다. 이대통령과 친이계가 주도권을 움켜쥐고 강력하게 국정 드라이브를 건다는 전략이다. 여기에는 친박계의 결속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배경에 깔려 있다. 올 초 친이계의 한 의원은 기자에게 “언론에서 친박계를 너무 부풀린 경향이 있다. 60명이라고까지 분류하는데, 진짜 친박을 자처하는 동료 의원은 그 절반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심정적으로 친박 성향이라고 해서 정치적 명운을 끝까지 같이한다는 보장도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친박계의 위력을 실제보다 너무 과장되게 본다는 불만이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도 이제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지난달 말 기자와의 만남에서 “친이건 친박이건 다 각각의 내부 사정이 있다. 속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회적 화법이지만 실제 속사정은 알려진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뉘앙스였다. 그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단문형 블로그 서비스)에 ‘한 집안에 권력자가 두 사람이 있으면 그 집은 무슨 일을 해도 성과가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올려 친박계 쪽을 강하게 자극했다.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여의도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두언 의원과 공성진 최고위원은 “9월 조기 전대를 통해 위기에 빠진 당의 조직을 하루빨리 추슬러야 한다”라고 주장해 이 전 최고위원의 복귀에 힘을 보태고 있다.  

친박계 쪽에서 이런 친이계의 의도를 못 읽었을 리 없다. 9월 조기 전대는 사실상 ‘이재오 복귀 전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친박계 중진 의원의 입각설이 자꾸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도 겉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내심 상당히 불쾌하다는 입장이다. 친박계의 또 다른 한 핵심 의원은 지난 7월 중순 한 사석에서 “김무성 의원은 절대 박 전 대표를 떠날 사람이 아니다.

지난 대선 경선 때 패배하고 난 뒤 저녁 회식 자리에서 김의원이 통곡을 하기도 했다. 진정성이 충분히 느껴졌다. 박 전 대표와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 것은 4선 중진 의원으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큰 방향에서 함께 갈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박 전 대표와 ‘좌장’격으로 통하는 김무성 의원 간의 갈등설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박 전 대표가 이번 미디어 관련법 개정안 강행 처리 정국에서 강경 행보를 보인 것도 상당히 계산된 수순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다소 느슨한 계파 결속력을 이번 기회에 바짝 조일 필요가 있다는 주변 참모들의 조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 교수는 “이번 정국에서 비록 박 전 대표의 개인 이미지는 다소 왔다갔다하는 모습으로 흠집을 입었지만, 대신 친박계의 결속력은 상당히 다지는 효과를 봤다. 박 전 대표의 선거판에서의 영향력은 이미 확인된 만큼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친박계의 결속력이 와해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라고 전망했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이번을 계기로 박 전 대표는 앞으로 사안별로 이대통령과 다른 독자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더 커졌다”라고 분석했다.

때를 기다린다는 친박계측의 말처럼, 그 때가 서서히 다가오는 느낌이다. 예상보다 더 빨라진다면, 2인자가 집권 중반기에 불과한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전례 없는 사태가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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