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에다 된 미국 청년의 기구한 인생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8.0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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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부터 14개월간 조직에 가담 체포 뒤 자살 폭탄 테러 계획도 털어놔

▲ 소말리아에서 활동 중인 알카에다 테러 조직원들. ⓒAP연합


바이런트 닐 비나스(25)는 한때 떠돌이 신세였지만 비교적 선량한 미국 청년이었다. 그의 기구한 생애는 알카에다가 어떻게 외국인 지원자를 모집하고 훈련시켜 테러를 자행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삶은 벨기에 출신 담당 변호사가 미국 연방수사국(FBI) 신문조서를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지난 1월 브루클린에 있는 연방순회법정 진술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14개월의 알카에다 생활을 진술했다. 그는 알카에다의 훈련을 받고 미군을 죽이는 테러 계획을 음모했다고 자백했다. 만약 그가 체포되지 않았다면 롱아일랜드의 철도는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비나스의 증언은 알카에다가 벨기에에서 시도하려던 자살 폭탄 공격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의 무게는 서부 파키스탄에서 암약하는 알카에다의 활동과 조직에 관한 희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데 있다. 또한, 멀쩡한 미국 청년이 세계를 반 바퀴나 돌아 지하드 전사가 되고, 왜 미군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실마리를 던진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가 알카에다 광신도가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순간적이었다. 테러 교육 캠프에서 TNT나 C4 같은 폭발물 처리법을 배웠다. 너무도 신이 났다. 또한, 납치와 암살에 관한 전문 교육은 스릴마저 느끼게 했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 이슬람에 심취하게 되었고 알카에다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는 미스터리에 속해 있고, 자신도 그 동기를 모른다. 그는 질이 나쁜 거리의 깡패도 아니었고 테러를 음모한 흔적도 없다. 성질이 편협하거나 세상에 대한 맹목적 증오도 없었다.

 말씨도 조용하고 천식까지 앓던 그가 영혼의 상처를 받은 일은 있다. 이혼을 둘러싼 부모의 긴긴 법정 투쟁에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그의 사진첩에는 중학교와 고교 시절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 그의 친구에 의하면 그는 일찍부터 마약을 하다가 성질이 날카로워졌다고 한다. 거식증까지 걸려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가 한때 몸담았던 보이스카우트나 가톨릭 성가대의 친구들은 그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는 2002년 미국 육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3주 후에 탈락했다. 신체적 이유인지 적성 부족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문조서에 의하면 비나스는 2004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어 수니파 이슬람의 근본주의 종파인 살라피 멤버가 되었다. 2007년까지는 롱아일랜드에 있는 사원으로 가서 기도에 참가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 동료들은 그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게 설교를 했던 이슬람 성직자 이맘은 자신의 신도 속에 알카에다를 지향하는 청년이 있을 줄 상상하지 못했다.

2007년 9월10일 그는 파키스탄 라호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의 도움으로 미국을 떠났으나 친구들은 그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했다. 라호르에 도착한 그는 뉴욕에서 온 다른 미국인에게 전화를 걸어 알카에다 훈련소에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된다. 3주간 그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산악 지대를 누비며 체력을 단련했다. 가끔 소총과 로켓 추진 수류탄으로 아프가니스탄 군 기지를 공격했다. 비나스는 주로 동굴 속에 탄약을 저장하는 일을 맡았다.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그는 자살 폭탄 조직의 요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즉각 동의했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그에 대한 세뇌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추가 교육을 시켰다. 그는 2008년에야 드디어 정규 알카에다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정규 알카에다 교육받고 미군 기지도 두 차례 공격

교육은 3단계로 구성되었다. 1단계는 AK-47과 기관총, 권총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폭약을 다루는 2단계가 매우 중요하다. 비나스는 2단계에 푹 빠졌다. 15일간의 과정이 끝나면 폭탄 조끼 제조 교육이 기다리고 있다. 조끼에 폭탄을 내장하고 허리에 착용한 후 배터리와 전파를 어떻게 조작하는지를 가르친다. 교육생들은 각종 폭발물을 보고 냄새를 맡는 일을 매우 좋아했다.

 마지막 3단계는 로켓 추진 수류탄을 조작하는 것에 관한 교육이다. 비나스는 이 과정을 단기간에 숙지하고 테러 학교를 졸업했다. 문서를 위조하거나 독극물 사용, 첨단 폭약을 제조하는 과정도 있었으나 비나스는 이에 관한 교육은 받지 않았다. 조서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이나 포로의 대우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모든 교육 과정이 끝나면 교육생들은 자기 평가서를 작성하여 ‘A.S’라는 교관에게 제출하는데, 이것은 개인 신상 파일에 첨부된다. 미군과 나토기지를 공격할 자격을 갖춘 비나스는 드디어 실전에 나서 미군 기지에 두 번의 로켓 공격을 감행했다. 첫 번째 공격은 무선 장치 고장으로 실패했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미사일이 기지에서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추락했다.

 비나스는 여러 명의 알카에다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몇몇 테러 조직의 내면과 알카에다 기치 밑으로 지원자를 끌어 들이는 마술을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알카에다 요원들은 거지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 있다. 테러 캠프에 오는 경로는 유럽의 범죄 조직을 통하기도 하고 인터넷, 이슬람 사원, 친구들을 통해서 캠프의 존재를 알기도 한다. 

 알카에다가 되는 동기는 천차만별이다. 프랑스에서 모로코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요원은 알카에다의 국제모병책에 포섭되어 ‘국제 과정’에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아프가니스탄 내 나토 공격을 담당하는 지하드가 되었다. 그는 비나스에게 싸우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벨기에 혈통의 또 다른 모로코 청년은 유럽에서 테러 공격을 자행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이 청년과 비나스는 암살 교육을 받았다. 알카에다는 뒤에 이들에게 델컴퓨터를 제공했다. 이들은 컴퓨터를 통해 지하드 비디오를 보다가 유럽의 축구장을 공격하는 시나리오에 열광했다.

 벨기에에서 은행 강도를 했다는 또 다른 청년은 터키와 이란을 거쳐 파키스탄에 왔다. 그는 그러나 테러 캠프를 보고는 즉시 벨기에로 돌아갔다. 터키의 한 학생은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살 폭탄 앰뷸런스를 이용해 미군 기지를 공격했으나 타이밍이 빗나가는 바람에 미군에 피살되었다.

 비나스는 2008년 10월까지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머물렀다. 그는 아내로 삼을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페샤와르로 왔다가 파키스탄 정보원에게 체포되었다.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비나스는 천둥소리에도 놀라는 심약한 청년이었다. 이런 그가 알카에다가 된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다. 삶의 목표 상실과 부모의 이혼이 그를 극단으로 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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