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국가 기술, 줄줄 새나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8.0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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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KIST 연구원이 세계 최초 기술 빼돌려…국정원·검찰 공조 수사로 막아

▲ 한 국책 연구 기관의 원천 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가 기술에 대한 보안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뉴시스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국책 연구 기관이 보유한 핵심 기술이 하마터면 통째로 중국에 넘어갈 뻔했다.” 검찰은 지난 7월2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 출신 벤처사업가 고 아무개씨 등 네 명을 구속 기소했다. KIST가 세계 최초로 개발해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플라즈마(Plasma) 관련 기술을 중국에 넘기려 한 혐의이다. 검찰에 구속되기 직전에 고씨는 이미 중국 기업과 기술 이전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개발한 기술들이 통째로 중국에 넘어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검찰과 국정원의 공조로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국가 기술에 대한 보안 대책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고씨는 재직 당시 사용한 노트북을 이용해 관련 파일을 유출한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럼에도 고씨가 기술을 유출하기까지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는 점에서 국가 기술 관리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나, 처음 첩보를 입수한 국정원은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이번 사건이 자칫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로 번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이번에 기소된 연구원들은 이미 중국의 한 공기업과 기술뿐 아니라 관련 장비 설계도까지 이전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는 중국의 우주산업을 총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 내부적으로 사건에 대한 함구령이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전직 연구원에 의해 기술이 유출된 KIST측도 현재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라면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중국에 원천 기술 포함, 장비 설계도까지 이전 계약

<시사저널>이 KIST와 검찰, 국정원 등을 통해 취재한 결과를 종합해 보면 이번 사건은 KIST의 사내 벤처기업격인 ㅍ사에서 촉발되었다. 이 회사는 KIST 보유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지난 2000년 3월 설립되었다. 대표이사는 세계 최초로 플라즈마를 이용한 표면처리 기술을 개발한 고 아무개씨가 맡았다. 이 기술은 재료 표면의 화학 구조를 바꾸어 잘 붙지 않는 물질을 접착제 없이도 붙게 할 수 있다. 때문에 국내 기업 중 상당수가 현재 이 기술을 ㅍ사로부터 빌려 사용하고 있다. LG전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LG전자는 현재 자사의 휘센 에어컨에 관련 기술을 도입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기존 접착제 등 화학 물질을 이용할 경우 기기의 성능뿐 아니라 위험 물질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휘센 에어컨은 플라즈마 증착 기술을 이용해 표면의 성분을 바꾸었다. 때문에 열교환기에 물이 맺혀 성능이 저하되는 부작용을 잡았을 뿐 아니라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었다는 것이 회사측의 설명이다.

반도체 장비업체인 미래산업 역시 현재 관련 기술인 ㅍ사의 2층 FCCL(연성 회로기판) 라이선스를 받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할 경우 플라스틱 표면에 얇게 구리를 붙여 잘 구부러지는 연성 회로기판을 만들 수 있다. 때문에 현재 미래산업뿐 아니라 상당수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에서도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ㅍ사의 매출 역시 매년 급증하고 있다.

기술 유출 문제는 고씨가 지난 2007년 말 ㅍ사를 그만두면서 본격화되었다. 고씨는 함께 퇴사한 직원들과 함께 중국 대련 시에 ㅇ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핵심 기술은 모두 ㅍ사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고씨는 회사에서 사용하던 노트북을 반납하지 않고 들고 나온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일부 직원은 아예 외장 하드에 파일을 다운받아 기술을 유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공기업인 ㅈ사와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내용은 현재까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회사가 KIST에서 위탁받은 원천 기술뿐 아니라 장비의 설계도면까지 통째로 넘기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핵심 기술 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한 보안업체 관계자는 “기업의 경우 자사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 휴대전화 반입은 물론이고 인터넷 메신저나 e메일까지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재직 당시 가지고 있던 노트북이 유출되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KIST측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라는 말로 관리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ㅍ사가 연구원이 보유한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설립된 합작회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연구원이 보유한 지분은 10%대에 불과하다. 우리가 관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라고 토로했다.

다행히 국정원과 검찰의 공조 수사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국정원이 첫 역할을 맡았다. 국정원이 국가 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첩보를 받아 은밀히 고씨 등을 내사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국정원 내사 자료를 넘겨받은 검찰은 고씨와 직원들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가 유출된 사실을 상당 부분 확인했다. 하지만 고씨와 직원들은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결국, 고씨가 잠깐 귀국하는 틈을 타서 현장에서 그를 검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이후 발생 건수 해마다 크게 늘어

▲ 원천 기술 유출 혐의로 전직 연구원이 검찰에 구속된 KIST. ⓒ시사저널 임영무

하지만 보안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제2, 제3의 고씨’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업 기술 유출 사건은 지난 2003년 여섯 건에서 2004년 26건, 2005년 29건, 2006년 31건, 2007년 32건, 2008년 42건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유출 방법 또한 점차 지능화, 고도화하면서 피해액 또한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 때문에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고씨 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보안 절차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최선태 한국산업보안학회 회장은 “핵심 연구원이 의도를 가지고 기술 유출을 시도할 경우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기업이나 국책 연구 기관 스스로가 교육 등을 통해 보안 의식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에서도 현재 부처별로 나뉘어 있는 기술 유출 방지 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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