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나를 살렸다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8.1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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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위암과 싸울 수 있게 체력 길러줘”

ⓒ시사저널 박은숙

암을 이긴 사람들 Ⅰ- 오동진 씨

‘암=죽음’이라는 등식은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 말기 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암 발생 요인이 다양한 만큼 암을 이겨낸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일반적인 치료법 외에도 자연요법이나 정신력, 가족의 사랑 등에 힘입어 암을 치료한 사례들이 있다. 대부분 암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이런 치료법도 과학적인 설명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를 흔히 ‘기적’이라고 한다. 기적이든 우리가 모르는 의학적 효과이든, 중요한 점은 암을 이겨냈다는 사실이다. <시사저널>은 10회에 걸쳐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생생한 투병기를 소개한다.

“식사하셨습니까?” 점심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각에 기자를 만난 오동진씨(45)는 첫 인사로 뜬금없이 ‘밥’ 얘기를 꺼냈다. 그는 약 5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지만 지금은 완치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살 수 있는 확률이 10%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이겨낸 오씨는 그 이유를 ‘밥심’에서 찾았다.

2003년 겨울, 스포츠 마니아인 오씨는 여느 때처럼 스키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김밥을 먹다가 이상한 증세를 느꼈다. 그는 “고구마를 먹을 때 답답한 것처럼 김밥이 명치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조금 지나면 저절로 좋아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라며 처음으로 느낀 위암 증세를 설명했다.

위암 증세는 일반 소화불량과 비슷하다. 무심코 지나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같은 증세가 반복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씨가 병원을 찾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식도염 진단을 받고 보름치 약을 처방받았다. 차도는 없었고 오히려 증세가 심해졌다.

그는 “음식은 고사하고 물도 마시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어느 날 친구를 도와 창고에서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다가 갑자기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죽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심했다. 휴식을 취하니 좋아졌지만 대변을 보니 색깔이 검었다”라고 말했다. 

네 시간의 수술 그리고 항암 치료

흑변에 놀란 오씨는 동네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수원에 살았던 그는 아주대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는 “위암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림프절에도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수술을 받더라도 이후 상태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여섯 살배기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라며 죽음을 떠올렸던 그때를 상기했다.

그는 2004년 3월12일 위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오씨는 “죽을 때 죽더라도 수술은 제대로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내가 죽으면 아내와 딸은 어떻게 살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수술 하루 전날 집도의인 양한광 외과 교수는 수술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수술 2시간 만에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면 희망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라며 수술실로 향하던 순간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암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따라 위 절제 범위가 달라진다. 식도에 가까운 위 상부에 암이 있으면 위를 거의 다 잘라내야 한다. 위 중·하부에 암이 있으면 일부만 떼어내기도 한다. 한국 사람에게 생기는 위암은 주로 위 중·하부에 생긴다. 오씨 몸속에 있는 위암은 최악이었다. 암세포는 위 윗부분에 똬리를 틀고 있었고 일부 림프절에도 전이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를 제거하는 수술이 네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수술 후 몸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구역질 등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심지어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한다. 오씨도 80kg이던 체중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65kg까지 줄었다. 체력을 길러야 암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밥 세 끼를 거르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서 끼니때가 되면 밥 수레가 온다. 그 소리에 환자들은 모두 나가버린다. 밥을 먹지 않기 위해서다. 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기도 한다. 치료도 치료이지만 무엇보다 체력이 되지 않으면 암과 싸워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밥을 먹기 위해 하루 종일 물을 마셨다. 신기하게도 밥을 먹어도 구역질이 나지 않았다. 제때 밥 먹는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5년 동안 암과 싸울 수 있는 체력을 길러준 것은 밥심이었다”라며 끼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술 후 5년이 지난 지금 그가 암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데에는 가족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 수건이나 두건으로 가려도 표시가 난다. 오씨도 이 때문에 짜증이 났다고 했다. 사실 그 짜증은 가장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가족이 없었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것”

그는 “보험으로 병원비는 해결했지만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암에 걸려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대단했다. 암을 이기려면 성격이 유해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항상 날이 서 있었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암이 완치될 때까지 밥벌이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가 보험 영업 등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불량주부였다.(웃음) 장모도 하루 삼시 끼니를 챙기면서 사위인 나를 보살폈다. 친형은 나름으로 동생을 살리기 위해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쫓아다녔다. 이런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지 모른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가족력이 있다. 모친이 오래전 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가족력에서 위암 원인이 될 만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1992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김치와 젓갈을 만드는 일을 했다. 솜씨가 좋아 일본인들까지 어머니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짠 음식이 위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라며 가족력을 설명했다.
암에 걸리기 이전 오씨는 식사 때마다 얼큰한 찌개를 즐겼다. 끼니마다 밥 두 그릇을 비워야 직성이 풀렸고, 식사 후에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직장에 출근해서는 컵라면을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은 아침마다 물과 토마토 주스를 마신다. 식사 때는 청국장과 된장국을 먹는다. 되도록 싱겁게 먹고 소식한다”라고 말했다.

암과 싸우는 동안 오씨는 직장, 집, 취미 등 모든 환경도 바꾸었다. 환경에 변화를 준 것도 암을 이긴 한 요인이라고 오씨는 믿고 있다.

그는 “볼링공에 손가락이 들어가는 구멍을 뚫을 때 여러 가지 유해물질이 나온다. 이것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골프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좋은 환경을 찾아가기 위해 수술 직후에 2~3개월 동안 사이판으로 이민까지 갔다. 경기가 좋지 않아 귀국했지만 도시 한복판에 있던 집을 산기슭에 있는 아파트로 옮겼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등산도 시작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한라산에 오를 정도로 열중했다”라고 말했다. 

누구든 암에 걸리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다른 환자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면서 인터뷰에 임한 오씨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굳은 의지가 나와 주변을 변화시켜 암을 이길 수 있게 만든다.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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