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서 한달까지 ‘전략적 휴식’
  • 파리·최정민 통신원 ()
  • 승인 2009.08.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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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대로 즐기는’ 세계 각국 정상들의 여름휴가 / 은근한 노출 통해 홍보 효과 노리기도

▲ 8월3일 푸틴 러시아 총리가 휴가 중 말에게 뭔가를 먹이고 있다. ⓒAFP

상의를 벗어던진 근육질의 남성이 유유히 말을 타고 산림을 가로지른다. 그 남성은 계곡의 호수에서 멋지게 버터플라이로 물살을 가른다. 영화나 텔레비전 광고의 한 장면이 아니다. 바로 러시아의 ‘상왕’인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휴가 모습이다. 한 해의 피로를 풀고 사적인 시간을 갖는 휴가. 그 백미인 여름휴가가 서방의 대통령들에게는 점점 더 숨길 수 없는, 숨기지 않는 휴가가 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선택한 첫 여름 휴가지는 대통령 전용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가 아닌 메사츠세츠 주에 위치한 고급 여름 별장이다. 프랑스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오바마의 휴가를 ‘쉬크’한 휴가라고 평했다. 경제 위기인 시점을 감안한다면, 과감한 행보인 셈이다. 반면,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스코틀랜드의 커콜디 인근 자택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그동안 즐기지 못한 스포츠를 즐기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브라운 총리의 휴가지는 ‘소파’라고 보도했다.

브라운 총리처럼 조용히 휴가를 떠나는 또 다른 수반은 바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이다. 지난 7월25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축제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메르켈 총리의 남편은 아마추어 바그너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바이로이트 행사만을 언론에 공개했을 뿐 그 이후 일정은 비공식으로 진행한다고 밝혔던 메르켈 총리는 그러나 언론용 멘트를 잊지 않았다. “정치 생각을 잊고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래서 다가올 총선에 준비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올해는 독일에서 정치 일정이 뜨거운 해이다.
여름휴가 후 무려 세 개의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9월27일로 예정된 총선이 가장 큰 일정이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의 휴가에는 고심이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그녀는 61%의 지지율로, 21%를 얻는 반대파 사민당(SPD) 총리 후보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일에서는 휴가 중의 유세 활동이 나쁜 인상을 남긴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정치를 잊고 푹 쉴 수 있는 이상적인 휴가가 된 셈이다.

반면,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르루스코니 총리는 ‘자숙’의 휴가를 보내고 있다. 이혼 소동과 젊은 모델과의 염문설로 물의를 빚은 그는 가족들과의 휴가와 지진 피해지를 둘러보는 얌전한 일정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번 여름휴가를 이용해 이후 정국의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언론을 상대하기 위해 스캔들 전문 저널리스트인 비토리오 펠트리(VITTORIO FELTRI)를 자신이 갖고 있는 미디어 왕국의 일간지인 ‘일 지오르날(IL GIORNALE)’의 편집장으로 기용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유력 언론에 따르면 총리의 형제인 파울로 베를루스코니가 펠트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수백만 유로를 지불했을 것이라고 한다.

사르코지, 휴가 중 조깅하다가 쓰러진 뒤 인기 치솟아

▲ 8월3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부부가 휴가지에서 바위 위를 걷고 있다. ⓒAFP

하지만 이번 여름휴가에서 그 누구보다 언론의 많은 이목을 받은 국가 수반은 뭐니뭐니해도 사르코지라 할 수 있다. 휴가를 앞두고 고온의 날씨에 무리한 조깅을 하다가 실신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주치의로부터 완전한 휴가를 지침받고 부담 없이 떠나 이탈리아에 있는 영부인 부르니 여사의 가족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르코지의 실신이 그의 인기도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수반이나 정치인들에게 건강의 적신호는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한다. 현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2006년 유세 도중에 졸도해, 그해 선거에서 참패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르코지의 경우 이번 실신 사고가 오히려 그의 인기도가 상승하는 기현상을 가져왔다. 사고 당시 정치 미디어 전문가인 드니 뮈제는 “이번 사고로 취임 이후 수퍼 대통령으로 각인되었던 초인적인 이미지에서 ‘평범한 인간적인 이미지’로 변화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최근 프랑스 시사 주간지 <렉스프레스>가 CSA의 조사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르코지의 선호도는 지난 5월 41%에서 51%로 상승했다. <렉스프레스>는 국가 수반의 실신이 인기도를 상승케 한 전대미문의 사례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정치인들의 휴가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것은 행선지 정도가 전부였다. 프랑스 역대 대통령들의 휴가 취향을 보면 “휴가를 통해 평정을 찾는다”라고 말해왔던 샤를 드골 대통령은 ‘스파르타’적인 휴가 스타일이었다. 퐁피두 대통령의 경우 엘리제궁에 입성하면서 프랑스 남부 지중해 부호들의 휴양지인 생트로페의 사교계를 떠나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취임 이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대통령 전용 별장에서 휴가를 즐겼다. 지스카르 데스탕 대통령의 경우 대부호 출신답게 알프스에서 스키나 카메룬 사냥 여행 등을 즐겼다. 미테랑 대통령의 경우 시골에서 독서하거나 지인들과의 긴 산책과 이집트 여행 등을 즐겼다. 휴가 마니아였던 쟈크 시라크 전 대통령의 경우 휴가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모리스 섬이나 대통령 전용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던 그가 2003년 3주간 캐나다를 방문했을 당시, 프랑스에서는 초유의 폭염으로 3주간 2만명의 노인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3주 동안 나타나지 않은 그를 두고 ‘3주간의 실종’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유럽 국가 수반들의 여름휴가는 대개 3주에서 한 달간이다.

정치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크리스티앙 델포트 베르사이유 대학 교수에 따르면 대통령의 휴가 모습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지스카르 데스댕 프랑스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국가 수반들은 주기적으로 휴가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정치인은 누구나 늘 여론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속성이 있다. 여름휴가 동안 잊혀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목적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지금의 경제 위기와 관련해 “경제 위기는 국가 수반들이 겸손해지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허영이나 자만이 용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국가 수반들의 휴가 또한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적인 행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휴가 홍보를 두고 남성 전문지 <맥심>의 러시아 편집장인 알렉산더 말렌코브는 “푸틴의 이미지 활용은 고도의 미디어 전략이다. 러시아에서는 문화적이거나 지적인 것은 중요치 않다. 일단 강해 보여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푸틴은 지난 2007년에는 모나코의 알버트 왕자를 대동하고 낚시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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