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가 급한데 보상받을 길 막막”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08.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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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가 급한데 보상받을 길 막막”

ⓒ시사저널 이종현


지난 8월6일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4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일본 정부는 소송이 진행 중인 원폭 피해자 전원을 구제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피해자들도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보상의 범위이다. 지난 8월12일 서울 성북구 미아동에 있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원폭협회)에서 김용길 회장을 만나 원폭 피해자 보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보았다. 김회장은 “보상 문제가 진일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소송 중인 일본 원폭 피해자 전원을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피폭자들이 보상받을 길도 열린 것인가?

일본 정부가 원폭증 환자로 인정하면 매달 13만7천4백30엔(약 1백8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가 모두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지정한 병명에 해당되어야 한다. 일본은 악성종양으로 치료를 받고 있거나 원폭의 방사선으로 인한 백내장, 부갑상선 기능항진증, 심근경색에 걸린 환자만을 대상으로 원폭증을 인정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이런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가 수십 명에 그치고 있다. 일본 정부에 원폭증 환자로 신청한 사람도 20~30명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 협회에 등록하지 않아 파악이 되지 않는 환자들까지 합쳐 100~1백5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나머지 2천7백여 명은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

악성종양 환자에 해당되지 않는 피폭자들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원폭협회에 등록된 2천7백명의 피폭자 가운데 2천5백명 정도가 건강관리 수당을 받고 있다. 매달 3만3천8백 엔(약 44만원)으로 적은 돈이다. 피폭자 1백85명은 건강관리수첩을 발급받지 못해 이 금액조차도 수령하지 못하고 있다. 건강관리수첩은 피폭자가 피폭 현장에 있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증인 두 명을 내세워야 발급된다. 하지만 64년 전에 발생한 일을 증언해 줄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수첩을 내주지 않으려는 일본의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은 문제점을 지난 2월17일, 일본 국회의원과 후생노동성 관리를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검토해 보겠다고 했는데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피폭자들에게 가장 큰 불만은 무엇인가?

‘치료비 상한제’이다. 일본 정부는 내국인에게는 치료비 상한액을 정하지 않고 전액 지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재외 피폭자들에게는 치료비 상한액을 정하고 차별하고 있다. 똑같은 피폭자인데 일본인과 한국인의 지원액이 다른 것이다. 지원액도 쥐꼬리만 하다. 매년 13만3천 엔(약 1백70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적은 금액인지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후쿠오카의 경우 75세 이상 일본인들이 지출하는 1인당 평균 의료비가 연간 1백8만 엔으로 치료비 상한액보다 7배나 높다. 일반인들이 노인성 질환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도 이것보다 많다. 피폭자들은 오죽하겠나.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현실과 동떨어진 금액을 지원해 주면서 생색을 내고 있다.

지난해 말에 피폭자 2천7백명 전원이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402호 통달로 건강관리 수당을 지급받지 못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이 진행 중이다. 그 이전 해인 2007년에 일본 최고재판소가 이미 정신적 손해배상액을 1인당 1백20만 엔(1천5백만원정도)씩 지급하라고 최종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판례가 있기 때문에 승소하리라고 본다. 일본 변호사들은 판결 이전에 합의로 보상액을 낮추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1인당 1백10만 엔(1천4백만원 정도)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도 있다(402호 통달은 1974년, 해외에 거주하는 피폭자들에게는 건강관리 수당을 지급하지 않도록 한 조치이다. 소송이 이어지자 일본 정부는 2003년, 해외 거주 피폭자에게도 수당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402호 통달이 실시되기 이전에 받지 못한 건강관리 수당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승소하게 되면 1인당 1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일단 공소시효 5년이 지났다. 일부에서는 건강관리 수당은 시효와 상관없이 소급 지원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일본 정권이 바뀌면 정치적으로 접근할 계획은 가지고 있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면 ‘과거 청산 없이는 미래도 없다’라는 논리로 제대로 된 피해보상을 요구하겠다.

마냥 뒷짐만 지고 있는 한국 정부에 대해 피폭자들의 불만이 대단하다.

지난해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피폭자 개인이 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만약 승소하더라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또 다른 피폭자는 혜택을 볼 수 없게 된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피폭자 전원을 구제해 줄 수 있는 피해보상 요구를 해야 하는 데도 모른 척했다. 외교적 보호를 받을 권리와 재산권을 침해받아왔기 때문에 헌법소원을 냈다. 지난해 조진래 의원(한나라당) 등 여야 국회의원 1백3명이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하 원폭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계류 중인 이 특별법이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다.

고령인 피폭자들이 매년 100여 명씩 사망하고 있다.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여생이라도 편안하게 지내다 갈 수 있도록 복지회관을 두 군데 정도 더 설립해야 한다. 지금 합천 복지회관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백10명밖에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하다. 실태조사도 빨리 해야 한다. 협회 차원에서 피폭자가 체험한 ‘증언기’를 집필하려고 예산을 잡아보니 1억원 정도가 필요했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절실하다. 정부도 정부지만 기업들도 피폭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난 64년 동안 제대로 된 지원 한 번 없었으니 이제는 눈길을 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한시가 급한 사람들이다.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힘들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해 일본 후생노동성에 찾아가서 통계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원폭 당시 일본 피폭자는 70만명이었고, 한국 피폭자는 7만명으로 10%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생존자 숫자는 일본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똑같은 피해를 입고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못 먹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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