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폭’만큼 처절했던 64년 세월
  • 합천·이은지 기자 (lej81@sisapress.com)
  • 승인 2009.08.18 18: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 일본 정부 보상받을 길 열려…지정 병명에 해당될 때 혜택

▲ 1945년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인 조차남 할머니가 원폭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맨 왼쪽). 오른쪽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보관되어 있는 원폭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의 증언록과 2세 사진, 피해자 기록부. ⓒ시사저널 임준선


지난 8월6일 일본의 아소 다로 총리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중인 원자폭탄 피해자(이하 피폭자)들을 전부 구제하겠다고 밝혔다. 뒤늦은 결정이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피폭자 전원이 보상을 받기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아직은 일본 정부가 지정한 병명에 해당하는 이들만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보상받을 수 있는 한국인 피폭자들은 1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시사저널>은 원폭 피해자 구제가 발표된 뒤인 지난 8월10일 경남 합천에 있는 일명 ‘피폭자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피폭자들은 일본 정부와의 오랜 싸움 때문인지 하나같이 지친 표정들이었다. 합천은 전국 최대의 피폭자 거주 지역이다. 국내 피폭자 2천6백50명 중 6백45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 합천 사람들이 일본에 강제 징용될 때 히로시마에 집중 배치된 탓이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강요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한 피해는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해왔다. 이들은 일본 정부의 냉대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64년간 처절한 싸움을 벌여왔다.

조차남 할머니(88)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다. 그녀는 “죽는 것이 제일 편하다. 그런데 죽지도 않는다. 어떡해야 할꼬…”라며 말끝을 흐렸다. 흉년이 거듭되는 합천에서 도저히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조할머니는 1940년쯤 큰딸을 들쳐 업고 일본으로 향했다고 한다.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다행히 굴속에 몸을 숨겨 목숨은 건졌지만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 뒤 지독한 가난이 엄습해왔다. 조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냥하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았다. 아이를 일곱 명이나 낳았지만 세 명이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10년 전에는 남편마저 죽었다. 자식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라며 씁쓸해했다. 조할머니의 셋째딸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지만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다고 한다. 돈 때문이란다. “아들딸도 모두 몸이 성치 않아 가난하다. 서로 만나봤자 도움이 될 것도 없다. 몸이 아파도 자식들을 찾지 않는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자식들이 지난 6월, 조할머니를 찾아왔다.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해 1천4백50만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로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일본으로 오지 않으면 건강관리수첩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한국 피폭자들과 일본 시민단체들의 소송과 불만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 법은 지난해 말 개정되었다. 한국 내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에서도 발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조할머니는 2006년 건강관리수첩을 신청한 뒤 소송이 진행되던 2년간 지급받지 못한 건강관리수당을 소급해 지급받았다.

법정 거쳐야 지원금 준 일본 정부에 분통

▲ 원폭 피해자인 김갑순 할머니가 흉터를 보여주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까막눈에 귀까지 어두운 할머니가 어려운 법정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원폭협회) 합천지부가 대리인을 세워 조할머니를 포함한 여섯 명의 소송을 진행한 결과였다. 합천지부 심진태 지부장은 “지원금을 한 푼이라도 더 늦게, 덜 주기 위한 일본 정부의 술책이었다. 한 푼을 주더라도 무조건 법정을 통해 판결을 받으라고 한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본의 고자세로 인해 원폭협회가 지난 64년간 제기한 소송만 30건이 넘는다. 지부 단위별로 작게 이루어진 소송까지 합치면 100건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 푼이 아까운 피폭자들에게 소송 비용은 크나큰 부담이다. 심진태 지부장은 “일본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법망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한국 피폭자들의 보상 문제를 기피해왔다. 해외에 거주하는 피폭자 전원에 대한 보상 문제는 거론되기조차 힘들다”라며 암담한 상황을 전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일본 정부가 해외 거주자들에게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하지 않도록 한 402호 통달 조치가 철회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일본 정부는 1974년, 402호 통달을 각 지역에 내려보내 해외 거주자들의 건강관리수당 지급을 막았다. 일본을 떠나면 지원금도 줄 수 없다는 논리였다. 피해는 사람이 보는데, 보상액은 구역을 지정해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만 지급한다는 궤변이었다. 한국 피폭자와 일본 시민단체들의 소송과 불만이 이어졌고, 결국 2003년 일본 정부는 이 조치를 철회했다. 29년 만에 이룬, 더디지만 의미 있는 성과였다.

한국 피폭자들은 이런 소송과 문제 제기를 개인의 짐으로 떠넘기고 있는 한국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 김갑순 할머니(75)는 아픈 몸 때문에 병원을 밥 먹듯이 오간다. 지난 7월30일에도 협심증 수술을 받았다. 수술비 3백만원을 개인 비용으로 치렀다. 김할머니는 “돈이 제일 문제이다. 몸이 아파서 직장에 나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한 푼도 번 적이 없다. 부모님들이 강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고, 나는 일본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다. 힘없고 무능한 나라 탓에 나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는데도 고통은 왜 개인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가”라며 원망했다.

한국 정부의 방임주의도 ‘악몽의 세월’ 보내게 해

한국 정부가 지급하는 지원금은 월 10만원의 진료보조비가 전부이다. 사망했을 때는 1백50만원을 지원해 준다. 지난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한국 피폭자들을 위해 지원금을 갹출하기로 합의해 복지기금이 조성되었다. 이 기금마저도 바닥을 드러내는 판국에 피폭자 전수 조사나 피폭자 2세 지원은 꿈같은 이야기이다. 

피폭자들은 상임위에 계류 중인 특별법이 한시라도 빨리 통과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한나라당 조진래 의원 등 여야 1백3명은 지난해 11월,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일본 정부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와 한국 정부의 나 몰라라 식 방임주의로 피폭자들의 지난 64년은 악몽과 같았다. 합천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안부자 할머니(73)는 자다가도 그때가 생각나 벌떡벌떡 깬다고 했다. 그녀는 원폭 당시 생긴 얼굴 흉터 때문에 이혼을 당했다. 결혼할 당시에도 흉터는 있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후 ‘흉터가 그렇게 심한지 몰랐다’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이혼을 받아들여야 했다. 절간을 돌아다니며 구걸로 연명해나갔다. 사람 세 명만 모여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사람들 없는 곳으로 돌아다녔다. 안할머니는 “마음의 상처는 평생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원폭협회는 이제라도 한국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대외적인 행보를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천지부 심진태 지부장은 “특별법이 통과된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또 다른 피폭자들이 있는 33개국에 이를 적극 알려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을 제외한 피해국에서 모두 특별법을 만들어 통과시키게 되면 결국, 일본도 사죄하고 보상하게 된다. 즉, 국가가 나서야 한국 피폭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동시에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원폭 투하가 가져오는 재앙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태 조사를 면밀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