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과 끈기, 저항으로 건넌 ‘인동초’ 세월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8.1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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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한국 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영욕의 세월을 보낸 정치인도 없다. 네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세 번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한 후 네 번째에 뜻을 이루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 역경에 대해 사람들은 ‘인동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6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후광’은 바로 고향 마을의 지명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44년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목포상선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며 관리인(사장)으로 승승장구했고, 당시 해운업계에서는 ‘떠오르는 청년 사업가’로 주목받았다.

그는 ‘사업’보다는 ‘정치’에 더 뜻을 두었다. 1945년 8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곧 탈퇴했다. 목포 신민당 지부에서도 잠시 있었으나 오래 적을 두지 않았다. 1948년에는 목포일보 사장에 취임했고, 2년 동안 신문사 사주로 활동했다. 이때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이 터질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사업 관계로 서울에 출장 중이었다. 전쟁이 터진 후 마땅한 교통 수단이 없자 혼자서 목포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1950년 9월 김 전 대통령은 생애 처음으로 죽을 고비를 맞는다. 목포 인근에서 북한군에 체포된 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총살 직전에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다음 해인 1951년에는 목포해운(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등장한 것은 1961년 5월이다. 강원도 인제에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세 번 연속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면서 시련기를 거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당선 3일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1970년 9월29일은 김 전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제7대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박빙의 승부를 펼쳤으나, 100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정희 정권의 집중 표적이 된 시기와 맞물린다. 1971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두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다. 같은 당 소속의 다른 후보를 지원 유세하기 위해 지방을 순회하던 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 2000년 노벨상 수상(맨 왼쪽 큰 사진). 1981년 내란 음모 혐의로 수감 중 모습, 1985년 민추협 시절 김영삼, 김대중 회동. 1992년 정계 은퇴 선언 당시. 1995년 대통령 취임.(작은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연합뉴스(작은사진 상단 왼쪽과 오른쪽)

 

국제 사회와 국민들 힘으로 생사의 고비 넘어서

1972년 신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던 중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도쿄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첫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국민투표 무효 선언을 하는 등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이어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유신 정권에게는 최대의 방해자이자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 김 전 대통령을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래스호텔에서 납치한 후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납치 5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세 번째 죽을 고비였다.

지난 1979년 10월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은 그에게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박대통령이 시해되면서 유신 시절 발효되었던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김 전 대통령도 가택 연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사면·복권되면서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도 잠시였다.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의 가혹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 금남로에서 학생·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 1980년 5월17일 김 전 대통령은 동교동 자택에서 체포된 후 구속되었다. 그 후 광주 민주화운동의 수괴로 지목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생애 네 번째 죽을 고비를 맞은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김 전 대통령을 구한 것은 국제 사회와 국민들이었다. 국내외에서 구명운동이 더욱 확산되자 신군부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강제로 미국으로 쫓아냈다. 그는 미국에서도 각종 연설이나 강연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1985년 2월. 미국 망명 2년3개월 만에 김 전 대통령은 귀국을 결정한다. 측근들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암살될 수 있다’라며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귀국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던 고국 땅에 도착하자 그를 기다린 것은 전두환 정권의 기관원들이었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을 곧바로 동교동 자택에 연금시켰다. 1987년 4월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을 가택 연금에서 해제하고 곧이어 사면·복권시켰다. 야권 대통령 후보가 단일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된 조치였다.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은 김 전 대통령을 고문으로 영입했고, 김영삼 총재와 대통령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양쪽의 입장 차와 견해차로 단일화는 실패했고, 이는 ‘민주화의 동지’였던 두 사람이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노벨상 수상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민당을 탈당한 후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역시 고배를 마셨다.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는 패했지만, 이듬해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가 만들어졌다. 궁지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야합으로 불리는 ‘3당 합당’으로 정국 운영의 돌파구를 찾았다.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도 합당 제의를 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1992년 5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 전 대통령은 제14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세 번째로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대권 운은 따르지 않았다. 평생의 라이벌이던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패한 후 곧바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영국으로 출국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세계 평화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영국에서 머무른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3년 7월 영국 체류 7개월 만에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2년 후에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일부 국민들은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긴 김 전 대통령을 비난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그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고뇌했던 순간이기도 하다.

국민회의는 1997년 5월 전당대회에서 김 전 대통령을 제15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네 번째 대권 도전이자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그해 12월 김 전 대통령은 극적으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건국 이후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였다.

김 전 대통령은 평소 ‘정치 보복은 없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을 핍박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사면·복권시키면서 ‘용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평화주의자였다. 집권 5년 동안 ‘남북한 평화 정착’을 실현하기 위해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실시했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내면서 남북은 적대적 관계에서 화해 무드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공로로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연구·강연 활동에 전념해 오다 지병이 악화되면서 서거했다.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DJ 어록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좌익 독재뿐만 아니라 우익 독재도 똑같은 적이다. 히틀러도, 도조(東條)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음모에 의한 1인 독재도 민주주의의 적인 데는 다름이 없다.
(1969년 7월19일 ‘3선 개헌 반대’ 시국 강연회에서)

힘이 있어도 남을 침략하지 않고 그러나 내 주체성은 꼭 지키고,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화, 독자적인 의식 구조, 독자적인 정치·경제·학문, 제도를 유지해 가는 그러한 평화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면, 우리 한민족은 위대한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1987년 9월10일, ‘독재를 이겨낸 위대한 우리 민족’ 연설문 중에서)

정치는 심산유곡에 핀 한 떨기의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다. 연꽃을 피게 하고 정치를 예술화하는 것은 국민의 예지와 책임감과 결단에 있다고 할 것이다.
(1993년 출간된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따른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역한 자는 망한다고 했는데, 하늘이 바로 국민인 것입니다. 유일하게 현명하고,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국민에게서 배우고 국민과 같이 가는 사람에게는 오판도 패배도 없습니다.
(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병행시키겠다.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199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인류 역사 이래 사람이 있는 곳에 인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곳에 반드시 인권의 침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권의 침해가 있는 곳에는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투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1998년 4월16일 ‘세계인권선언 50주년’ 메시지)

나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아시아의 도그마’를 일관되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위기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이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그런 나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4월23일 ‘서울경제국제회’의 연설 중에서)

자유는 지키는 자만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자유는 방종도 아니고 모든 원리에 대한 거부도 아니다.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전인적 완성을 이룩하는 데 필요한 제약과 조건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2000년 발간 저서 <옥중서신> 중에서)

오늘의 영광은 지난 40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남북 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을 일관되게 지지해 준 국민들의 성원 덕분입니다. 이 영광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돌리고자 합니다. 우리 국민과 더불어 이러한 노력을 성원해 준 세계의 민주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인권과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계속 헌신하고자 합니다.
(2000년 10월13일 ‘노벨 평화상 소감문’ 중에서)

공산주의 국가에 대해 억압과 고립화, 이런 것으로써 성공한 일이 없다. 그러나 개방으로 유도하고 대화를 하고 이렇게 해서 성공 안 한 적이 없다. 햇볕정책은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2002년 12월30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어느 누구의 인생이 되었건 모든 것이 순풍에 돛단 듯 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좌절시에도 포기하지 않고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결국은 성공한다.
(2004년 5월3일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당선자 간 환담’ 중에서)

정치의 중요한 요체는 국민과 같이 가야 합니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 발 앞으로 가야 합니다. 국민과 같이 나란히 서도 발전이 안 되고, 손 놓고 한 발 두 발 나가도 국민과 유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 58주년 기념 특별대담’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협력을 이룩하고,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 58주년 기념 특별대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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