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세월’ 건너 황혼 물드는 ‘3김 시대’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8.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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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YS·JP, 끊임없이 적과 동지의 경계 넘나들며 정국 주도 “지역 갈등·정쟁·대결 조장 등 과오는 풀고 가야”

▲ 8월18일 서울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이 세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건국 이후 격동의 60여 년을 이들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역사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먼저 영면했다. ‘3김 시대’가 갖는 우리 정치사의 가치와 공과는 이제 사가(史家)의 몫이 되고 있다.

‘3김 시대’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각각의 시기 동안 세 사람은 때로는 협력 관계를, 때로는 적대적 관계를 숨 가쁘게 오가며, 그야말로 ‘정치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라는 진리를 각인시켰다.
세 사람 간의 관계에서 1기에 해당하는 1960~70년대는 DJ와 YS의 협력 관계 그리고 DJ·YS와 JP 간의 대결 구도였다. DJ와 YS는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신민당의 세대교체를 이루어냈다. DJ는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YS는 1974년과 1978년 신민당 총재로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이때 JP는 양김씨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는 집권 여당인 공화당의 2인자로 당의장과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양김씨의 입장에서 보면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다.

3김 시대 2기에 해당하는 1980년대는 세 사람에게 또 다른  교훈을 남겼다. 협력 없이 혼자 가다가는 결국 실패한다는 것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찾아온 1980년의 ‘민주화의 봄’으로 3김씨는 절정을 맞이했다. 모든 뉴스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들의 몫이었다. 차기 대권은 당연히 세 사람 중에서 나올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등장은 세 사람의 손발을 모두 묶었다. 

결과적으로 3김씨 중 유일하게 대권을 못 잡은 이가 JP였지만, 사실은 JP가 가장 먼저 대권을 잡을 수도 있었다. JP에게 늘 따라다니는 ‘우유부단’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표현의 꼬리표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력을 보여주지 못한 그의 유약함을 탓하는 것이다.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직후가 바로 그랬다. ‘만년 2인자’에서 졸지에 여권의 1인자가 된 JP는 그해 11월12일 공화당 총재에 올랐다. 약 한 달 후인 12월6일에는 10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는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거권을 갖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다. JP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출마만 하면 당선이 보장되던 터였다. 물론 여권 내에서도 ‘JP 불가론’을 주장하는 반대파들이 많았지만, JP를 부추기는 지지층의 출마 요구는 집요했다. 하지만 JP는 숙고 끝에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체육관 대통령’보다는 국민들이 직접 뽑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상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0대 대통령에는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선출되었다. 만약 이때 JP가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한국의 정치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DJ-YS 화해, JP는 병마와 투쟁

▲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씨가 1988년 야당 대표 회담을 하고 있다.

세 사람은 암흑기를 거쳐 5공 정권 말기 민주화 바람을 타고 다시 정계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을 창당하고 1987년 제13대 대선에 출마했다. 이때 DJ와 YS가 끝내 국민들의 염원을 무시한 채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역사의 죄로 남아 있다. 결국,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YS와 DJ, JP는 2~4위로 낙선했다. 나중에 DJ는, 이때 대선 후보를 YS에게 양보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3기에 해당하는 1990년대 전반기는 YS와 JP의 협력 관계, 그리고 이들 두 사람과 DJ의 대립 관계가 형성된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YS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의 신민주공화당 등이 합당했다. 이를 계기로 제2 야당 총재에서 집권 여당 대표로 변신한 YS는 1992년 대선에서 JP의 협력을 얻고 비교적 손쉽게 대선에 당선했다. 반면, 혼자 야당으로 남게 된 DJ는 1987년에 이어 연거푸 대선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3당 합당에 얽힌 비화도 많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YS와의 합당을 제안한 것은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였다. 그는 노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YS와 접촉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또 하나의 창구를 통해 DJ와도 접촉했다. 그 역할은 박철언 전 장관이 맡았다. 당시 박 전 장관은 ‘황태자’로 불리며 노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의 합당 제의를 DJ는 거절했다. 만약 이때 DJ가 민정당과의 합당 제안에 찬성했다면 대한민국은 또 한 번 거세게 요동쳤을 것이다.

4기인 1990년대 후반기에는 DJ와 JP의 협력 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른바 ‘DJP 공조’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이전 협력 관계였던 YS와 JP의 반목이 자리 잡았다. 집권한 YS는 JP를 당 대표에 앉혔지만,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2인자에 길들여져 있던 JP도 이때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거세게 반발하며 측근 세력들을 이끌고 탈당해 충청권에 기반을 둔 자민련을 창당했다. JP가 가장 승부수다운 모습을 연출한 것이 이때였다. 후일 YS는 “그때 당을 뛰쳐나간 JP를 붙잡지 못한 것이 최대의 실수였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3김 시대의 마지막 최절정기였다. 한 명은 대통령으로, 두 명은 각각 제1 야당과 제2 야당의 총재로 대한민국 정치 지형도를 완벽하게 삼분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두 노회한 정객은 야권이 합치지 않고는 여당 후보를 이길 수 없음을 경험으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루어진 이른바 ‘DJP 연합’덕에 DJ는 대통령에 당선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다. JP가 YS에 이어 DJ와 손을 잡은 것은 모두 내각제 개헌 때문이었다. 이를 약속했던 DJ도 결과적으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1년 9월 JP는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JP의 정치 인생 역정도 그것으로 사실상 끝이었다. 3김씨와 함께 정치 인생을 죽 같이 해 온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3김 시대가 우리 정치사에 남긴 여러 공과 중 지역 갈등과 끊임없는 정쟁 및 대립은 청산해야 할 유산이다. DJ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그것을 풀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YS는 병상의 DJ를 찾아가 화해를 선언하며 쓸쓸히 퇴장했고, JP는 또 다른 병마와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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