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전쟁, 재생산되는 불안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9.01 18: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종플루 공포가 더욱 확산되면서 나라마다 백신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백신의 안전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일부러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엄마도 있다.” 개학날인 지난 8월25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 모인 학부모들은 신종플루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 세 명 중 두 명이 이런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최근 19세 이상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9%가 신종플루에 감염될까 두렵다고 답했다. 불안하지 않다는 답변은 30%에 그쳤다. 8월24일 현재 감염자는 3천1백13명으로 지난 7월22일 1천명을 넘긴 뒤 한 달 만에 세 배로 불어났다. 최근에는 하루 만에 100명 이상 감염자가 나오는 등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심폐질환자와 같은 고위험군에서는 폐렴 등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다. 언제든지 사망자가 속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가 활동하기 좋은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면서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국에서는 내성 바이러스까지 생겼다는 소식도 들린다. 내성이 생기면 타미플루ㆍ릴렌자 등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해도 약효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와중에 충격적인 보고서가 8월27일 공개되었다. 신종플루가 대유행하게 되면 최대 2만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정부 보고서이다.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신종플루 가을철 대비 방안이라는 관계부처 합동회의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신종플루 유행 규모를 입원 환자 10만~15만명, 사망자 1만~2만명으로 추정했다. 이는 항바이러스제와 백신 등으로 방역 대책을 펼쳤을 때의 예상치이다. 방역 대책이 없는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20%가 감염되고 입원 환자가 20만명, 사망자는 2만~4만명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신영수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이 최근 “한국에서 신종플루가 대유행하면 1천만명이 발병해 1만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유행하면 최악에는 1천만명까지 발병”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같은 날 긴급 기자회견에서 “일본 등 다수 나라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 적극 대처하고 있다. (한국도) 조속히 국가재난대책본부를 출범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거점 병원(4백55개)과 거점 약국(5백67개)을 지정하고 항바이러스제 24만명분을 배포하는 등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치료제 확보율을 11%(5백31만 명분)에서 20% 선으로 올리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사실 치료제는 유사시에 복제약으로 대처할 수 있다. 문제는 백신이다. 전세계 감염자가 63개국에서 27만명, 사망자가 2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신종플루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제약사는 10여 곳에 불과하다. WHO는 전세계 신종플루 백신 생산 규모를 연간 49억명분으로 발표했다가 최근 당초 예상의 25~50%로 생산 전망을 낮췄다. 선진국의 백신 확보율은 9~40%에 머무르고 있다. 이환종 서울대의대 감염관리과장은 “다국적 제약사가 생산할 백신 대부분은 이미 선진국이 예약해놓은 상태이다. 벌써 백신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세계 각국은 백신 확보전을 펼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현재까지 미국인 가운데 2백만명이 신종플루에 감염되었고, 5백22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망자가 최대 9만명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섬뜩한 보고서까지 나왔다. 미국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사상 초유의 백신 접종 계획을 마련했다. 현재까지 20억 달러에 가까운 비용을 투입해서 1억5천9백만명분의 백신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수개월 내에 자국민의 절반에게 백신을 접종하겠다는 것이다. 하워드 마켈 미시간 대학 의학사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백신 접종 계획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정작 이를 위해 필요한 백신은 신종플루 대유행이 예상되는 오는 10월 중순까지 기대치의 3분의 1에 못 미칠 것이라고 현지 언론은 전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추가로 30억 달러를 증액해서라도 더 많은 백신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내 2천8백여 개 지역 의료 기관은 백신 접종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졌다. 신종플루 감염자가 1주일 동안 11만명이 늘어나는 등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도 백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비축 목표는 5천3백만명분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지난 7월 시작한 백신 제조에 속도를 붙여 10월부터 접종할 방침이지만 연내에는 생산량이 1천3백만~1천7백만 명분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비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종플루 백신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마스조에 요이치 후생노동상은 최근 “내년 3월까지 5천3백만명분의 백신을 준비해야 한다. 부족분 1천5백만~2천만명분을 수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캐나다도 3억7천100만 달러를 투입해 백신 2천5백20만명분을 확보할 계획이다. 자국민 3천3백60만명 중에서 예방 접종을 희망하는 모든 국민에게 백신을 공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개도국들은 생산 시설이나 경제력 부족 등으로 백신 확보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태국 정부 산하 제약업체인 GPO는 생산 시설이 확보되지 않아 오는 12월께 1천만명분의 백신 공급 계획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마거릿 찬 WHO 사무총장은 “백신의 제한된 공급량 중 큰 몫이 부자 나라에 돌아가는 반면, 한쪽에서는 값을 치를 수 없어 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녹십자 백신 생산량 6백만명분으로 줄어

백신 부족 문제는 ‘남 얘기’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는 백신 생산 제약사가 있다. 녹십자가 2006년부터 국비 1백80억원 등 총 8백억원을 투입해서 전남 화순에 백신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지난 7월 준공한 이 공장으로 한국은 세계 12번째 백신 생산국이 되었다. 지난 6월까지만 해도 녹십자는 연간 1천만명분 이상의 백신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그동안 느긋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현재 생산 물량은 약 6백만명분으로 확 줄었다.

그 이유는 계란이다. 백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계란이 필요하다. 신종플루 바이러스 증식의 최적 환경이 부화되지 않고 태아 상태에 있는 병아리의 폐(肺)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용하는 계란이 청정란이다. 청정란을 생산할 암탉은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수 양계장에서 길러진다. 일반 양계장에서는 전염병이 도는 것을 막기 위해 사료에 항생제를 섞거나, 닭에게 예방 주사를 맞힌다. 하지만, 신종플루 백신 재료로 사용할 계란은 항생제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 항생제가 계란에 남아 있으면 백신의 효능을 떨어뜨리거나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유정란(수정란)은 항생제 등을 접하지 않은 ‘깨끗한 알’이라는 뜻에서 청정란이라고 불린다.

유정란 1개당 1.5명분의 백신을 만들 수 있다. 일반 독감 백신의 50%에 불과하다. 또, 바이러스의 유전자 구조 특성에 따라 계란에서 잘 자라는 것이 있고 안 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번 신종플루는 계란 배양 효율성이 떨어지는 편이다. 내년 초까지 6백만명분 백신 생산도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더 많은 유정란을 확보하려면 양계장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암탉은 6개월마다 살처분해야 하고 양계장 설비에 수십억 원을 투자해야 한다. 백신이 안 팔리면 양계 농가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부의 지원 없이 민간인이 양계장을 무작정 늘리지 못한다. 정부도 지원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과감한 투자로 충분한 물량을 확보했지만 신종플루가 슬그머니 사라지면 백신은 말 그대로 물로 전락한다. 1976년 미국 사례가 있다. 당시 돼지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퍼지자 미국 정부는 1억5천회분 백신을 개발했다. 그러나 돼지인플루엔자 감염이 확산되지 않아 백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정부, 백신 생산 때 면역증강제 사용 검토

정부는 내년 2월까지 인구의 27%에 해당하는 1천3백만명분의 백신을 확보하기로 했다. 국내 생산분 외에 나머지 7백만명분은 해외에서 구입해 올 예정이다. 이를 위해 이종구 질병관리본부장이 지난 8월24일부터 벨기에와 프랑스 제약사를 돌면서 백신 확보에 나섰다. 외국 제약사로부터 백신을 추가로 구입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면역증강제 사용을 검토 중이다. 백신 원료에 화학물질을 첨가해 같은 수의 유정란으로도 백신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별 문제 없이 생산한다면 백신 1천만 명분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방법이므로 안전성 문제가 관건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면역증강제를 사용한 백신은 전혀 새로운 신약이다. 그 약을 사용하려면 임상시험 등을 새로 해야 한다”라며 안전성 담보에 방점을 찍었다.

이처럼 신종플루 백신의 안전성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유정란이 부화 과정에서 각종 세균에 오염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서상희 충남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오염된 유정란으로 만든 백신은 쇼크사를 일으킬 수 있다. 부화장 관리가 체계적으로 되지 않아 유정란이 오염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이상할 정도이다. 정부가 백신 생산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묵인하는 것인지 의심된다”라며 유정란과 백신 오염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또, 정부는 지난 6월 신속한 심사 제도를 적용하더라도 백신 대량 생산 허가에는 최소 6.5개월 걸린다고 했다. 올해 백신 접종은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최근 정부는 11월 중순 백신 접종 실시를 목표로 정했다. 이를 위해 녹십자가 생산한 백신 원료에 대한 임상시험이 9월7일부터 고대구로병원 등에서 8주간 시행된다. 백신 생산과 접종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기기 위해 백신 안전성에 허점이 나타나지 않을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 미국 밴다빌트대학의료센터에서 새 신종플루 백신임상실험을 하고 있다. ⓒAP연합
현재 정부가 비축하고 있는 타미플루는 1백99만명분이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타미플루 확보 물량을 3백31만명분으로 늘릴 예정이다. 흡입제 형태의 치료제인 리렌자까지 포함하면 5백31만명분으로 전체 인구의 약 11% 수준이다. 정부는 이를 20%까지 높일 계획이다.

이 약의 판매권은 스위스 다국적 제약사 로슈가 가지고 있다. 독점 판매권은 2016년까지이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치료제 공급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의 사태에는 ‘특허권 강제 실시’라는 긴급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이는 1995년 발표된 WTO 협정에 따른 것으로 국가적 비상사태 및 공공의 목적의 경우 정부가 특허권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국내 제약사가 타미플루 복제약(제네릭)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005년 타이완 국가위생연구원은 18일간의 작업으로 타미플루와 99% 일치하는 시제품을 생산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 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은 8월25일 치료 거점 병원 간담회에서 “타미플루 특허 조치는 국제적인 신뢰가 걸린 문제이다. 현 단계에서 신종플루 치료제 특허 정지 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라고 밝혔다.

약을 구입하거나 개발할 능력이 있는 한국에서 강제 실시는 국제적 위상에 맞지 않는다는 점과 통상 마찰에 미칠 영향 등 여러 문제점을 고려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날 박하정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도 “특허권을 무효화하는 조치는 법적으로 사변에 준하거나 공공의 이익에 한해서만 적용되는데, 현재는 타미플루를 추가 구입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고 약이 부족해서 치료를 못 받는 상황도 아니다. 다만, 최악의 사태가 오면 국민의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문의가 이어지자 울스 플루어키어 한국로슈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타미플루는 연간 4억명분 생산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로부터 추가 주문이 들어오더라도 공급 차질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정부가 믿는 구석은 또 있다. 최근 페라미비르라는 새로운 신종플루 치료제가 개발되었다. 신종플루 내성 인플루엔자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질병관리통제센터는 아직 사용 허가가 나지 않은 이 약물을 이미 비축하기 시작했다. 국내 제약사 녹십자는 내년에 이 약을 미국과 공동으로 생산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